윗사진 : 샤삐우(Chapieux) 언덕의 노란 들꽃들
아래사진 : 본옴므(Bonhomme) 고개를 향하여
이태리 국경을 넘어 꾸르마이어로
(Balme – Bonhomme – Chapieux – Seigne – Courmayeur :주행거리 60키로, 주행시간 6시간)
2005년 7월 17일
간밤에 푹 쉬었기 때문에 상쾌한 기분으로 7시 아침식사를 할 수 있었다. 코코아 한 그릇, 빵과 버터와 잼으로 요기를 한다. 우리 식탁의 빵이 없어지는 속도는 다른 테이블의 2배가 되는 듯하다. 탄수화물 로딩(Carbohydrate Loading)을 충분히 해야 오늘 일정을 버티겠지.
오전 7시45분, 1,706미터의 발므(Balme)산장을 출발 급경사를 그대로 치고 올라 2,392미터의 본옴므고개(Col du Bonhomme)와 2,483미터의 끄와(Croix)고개를 넘어야 한다. 아니 치고 오르는 것이 아니라 자전거를 밀고 가야 하는 곳이다.
어떻게 올라갔는지도 모른다. 다리근육의 산소요구량이 심장박동수를 올리더니 결국 어제 마신 알코올이 내 엔진에 엇박자를 놓기 시작했다. 우려했던 부정맥 불규칙바운드가 온몸의 힘을 빼앗아 가고 한 발짝을 내 딛기가 어려워진다. 조심 조심 심호흡을 하여 심장을 달래며 일행과는 상관없이 내 페이스를 맞추어 가기로 했다. 사람들이 안 보이는 곳에서는 아침에 못한 실례를 하기도 하고...
4시간 걸려 크와고개를 넘자 황량한 고개자락 아래로 본옴므산장(Refuge du Bonhomme)이 나타났다. 어쨌든 쉬었다 가는 곳이니 황량하지만 고마운 곳이다. 내가 좋아하는 나무로 만든 등걸의자에 앉아 땀을 식힌다. 어디선가 헬리콥터가 나타나 산장 옆으로 착륙하였다. 부상자가 있나 보다. 싣고 가는 사람은 별다른 부상을 입은 것 같지도 않았는데 아마 근력과 심장이 약한 사람이었나 보다.
해발 1,554미터의 샤삐우(Chapieux)까지 950여 미터가 내리 경사진 내리막이다. 이제야 실력발휘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왠 걸 내리막이 하도 가파라 브레이크를 잡은 손가락은 물론 손바닥이 얼얼할 지경이다.
내리막에 똥 밭은 왜 이리 많은지, 아마도 방목하는 소들이 단체로 지나는 곳인 듯 하다. 분비물을 피하느라 온몸에 힘을 주며 내려오는 것을 결국 포기, 신경 안 쓰기로 했다. 그러나 소똥을 밟고 지나니 이번에 미끌미끌 브레이크가 듣질 않는다. 피하자니 그렇고 지나가자니 문제가 생기고 이럴 때 쓰는 사자성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내리막 온 사방엔 노랗고 파란 들꽃들이 예쁘게 피어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미끄러 넘어질까 한 눈 팔지도 못하고 내려왔다.
TMB(Tour de Mont Blanc) 표시를 순간 보지 못하고 내리막에서 일행을 잃어 버렸다. 그런데 저기 헬맷 3개가 쌩하고 달리고 있는 것이 언뜻 보인다. 으흥~ 도로 내리막! 자전거 기어를 최대로 놓고 아스팔트를 멋지게 내려간다. 처음으로 신나게 제대로 달려보는 내리막이다. 대관령 옛길 내리막 같이 꼬불꼬불 한참을 가는 길이다. 이곳에 오기 2주전, 전지훈련 하기 위해 대관령에서 강릉 쪽으로 도로를 타고 10분 내려가고 다시 그 길을 2시간 걸려 쉬지 않고 올라 온 적이 있었는데…
급경사를 다 내려와 길이 갈라지는 곳인데 일행이 보이질 않는다. 어느 쪽으로 갔으려나. 첨병이 없는 걸 보아하니 가는 방향으로 그대로 직진했겠지. 완만한 경사를 계속 내려가는데 왠지 불길한 생각이 든다. 꼬불꼬불 몇 번을 더 내려갔지만 점심을 먹기로 한 그 아래마을은 나타나지 않는다. 도로변 계곡은 아직도 깊고 깊어 회색 빛의 빙하물이 우루루 꽝꽝 폭포소리를 내며 굽이 치고 있다. 이런 페이스로 마을이 나오려면 한참을 가야 할 텐데…
아! 반대쪽으로 잘못 내려 왔구나. 갈라지는 곳에 일행이 없었으니 분명 고개 반대로 간 것 일게다. 어이쿠 최소한 2시간짜리 오르막인데 이걸 어쩐다. 히치하이크? 그러나 조금 전까지도 조금씩 지나던 차들이 영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쪽 팔리게 이곳까지 와서 자전거여행을 한다며 히치하이크를 하기도 그렇고,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경사를 오르기 시작했다.
정말 한심한 상황이다. 커브를 돌아 나오는 자동차 소리를 듣자마자 냅다 엄지 손가락질을 했다. 실패.. 그대로 가버리더군요. 한참을 지났지만 차도 별로 지나지 않고 그나마 세워주는 놈도 없다. 젊은 금발의 여자가 손가락을 들었다면 무조건 세웠을 텐데… 남자로 태어난 걸 잠깐 후회(?)하기도 했다. 다행히 30대 초반의 남자 여자 커플이 탄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아마 자기 여자친구가 옆에 있어서인지 친절하게도 전화기도 빌려주고 다운힐 시작점까지 오르락 내리락 해 주었다. 자동차론 10분인데 이거 잔차로 오르려면 2시간 짜리지.
일행을 찾은 곳은 도로가 갈라지는 곳에서 한참을 지나서였다. 일행들은 아스팔트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바로 옆 흙길로 질러서 내려 왔다고 한다. 그 길이 TMB 길이었다고? 도대체 처음 오는 내가, 앞서 가는 일행 꽁무니만 쫓던 내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나를 찾으러 이태리 볼자노(Volzano)의 등반가이자 산악디자이너인 임덕용선생이 그 내리막을 다시 걸어 올라갔다고 한다.
1시간쯤 지나서야 수습이 되었는데 이번엔 하나밖에 없는 샤삐우(Chapieux)마을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수가 없단다. 예약을 하지 않아 자리가 없다고.. 베낭무게를 줄이느라 이미 행동식(롯데양갱, 비스킷, 쌀라미쏘세지, 견과류등)들은 많이 축내었는데 다행히 남아 있는 물건(?)들이 있었다. 참고로 롯데표 양갱은 영규가 가장 좋아하는 행동식입니다. 해태표는 안된답니다.
1시간 30분 걸려 오른 1,870미터의 모뜨(Motte)산장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이제 프랑스와 이태리의 국경을 넘어서야 한다. 국경인 2,516미터 쌩느(Seigne)고개 까지는 2시간 30분, 걸어서 올라갔는지 메고 올라갔는지 기억도 없다. 지도를 보니 4,810미터 몽블랑 정상에서 쌩느 고개까지는 남남서 직선거리로 10키로 정도가 된다.
오후 6시30분, 오전 7시45분에 발므산장을 출발하였으니 11시간 째 산행인 셈이다. 따뜻한(?) 점심도 먹지 못하고... 이곳에서 오늘 숙박을 하여야 할 이태리의 설악동, 꾸르마이어(Courmayeur)까지는 아직 20여 키로미터가 남아있다.
사람이 걷는 속도가 시속 4-5키로 남짓이므로 걸어 간다면 4시간짜리 거리이다. 그러나 상태 좋은 임도 내리막을 자전차로 간다면 시속 20키로는 낼 수 있으며, 만약 대관령 정도의 내리막 아스팔트를 간다면 평균시속 40키로는 낼 수 있다. 꾸루마이어까지는 상태 좋은 임도 내리막과 경사 깊은 아스팔트 내리막의 연속이다. 순간 시속 64키로를 낼 때는 혹시 타이어 펑크날까 겁이 덜컥나기까지도 한다. 그러다 펑크나면 죽음인데.
길이가 6키로에 육박하는 웅장한 미아지 빙하(Glacier du Miage)의 혓바닥이 계곡을 타고 코앞에 까지 다가왔지만 오늘의 종착지 꾸르마이어(Courmyeur)에서 저녁을 대접할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는 영규의 재촉에 최고속도로 내려 오며 곁눈질로 석양의 풍광을 즐길 수밖에 없었다. 빙하가 호수까지 내려와 있고 빙하계곡에서 흘러 내리는 옥회색 물과 반대쪽 계곡에서 내려 오는 투명한 물이 합치는 광경은 또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산악전문가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갖고 싶어한다는 최고품질의 피켈과 아이젠을 만든다는 그리벨(Grivel)사의 고비(?)사장과 고비사장 부인 그리고 고비사장 딸이 우리와 저녁을 함께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최영규군은 그리벨사의 한국총판을 하고 있고 임덕용선생은 그리벨사 용품들의 디자인 컨설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그 자리에 같이하는 영광(?)을 가졌다.
냄새나고 몸에 착 붙는 타이즈들을 입은 복장은 우스꽝스러웠지만 간만에 제대로 된 이태리식당에서 우아한 사람들과 우아한 저녁을 했다. 치즈샐러드로 입맛을 돋운 후 스프와 토마토소스의 마카로니로 전채를 하고 어린 송아지 고기다짐이 옥수수가루 찜과 함께 메인으로 나왔다. 지역 특산물이라 몇 병만 유기농법으로 한정 생산한다는 도깨비(Evil)브랜드의 와인은 무슨 품종일까 한참을 뒤집어 봤지만 캐비닛소비뇽도 아니고 산지오베세도 아니고 뭔지 모르겠습디다.
불행하게도 몽블랑 전문가이자 우리들의 가이드 허긍열프로는 오랜만의 우아식에 위가 놀랐는지 전채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첫번째 디저트로 맛난 복숭아 샤벳이 복숭아 슬라이스와 함께 나왔으며(나는 허긍열프로 것까지 먹었음), 두번째 디저트로는 초코렛 무스케익이 나왔다. 너무 많은 양을 소화한 우리 모두는 오늘의 마지막 코스 카푸치노는 거절하였다. 2시간의 거나한 식사 후 우리는 그리벨(Grivel)사의 영빈관에서 늦은 잠을 청했다. 오후 10시.
5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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