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상적인 진도의 낙조
2005년 8월15일은 해방 60돌을 맞는 날입니다.
전국 여기저기서 이 날을 기리는 많은 행사가 열렸습니다.
저도 이 날을 그냥 무의미하게 보낼 수 없어서
가족들과 더불어 특별히 기억될 만한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멀리 남녘 바다 끝 전라남도의 진도를 방문하여 자전거로 누비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후 2시 반에 출발하여 대구에서 진도까지는 참 머나먼 코스였습니다.
구마고속도로로 진입하여 남해고속도로를 오래 달리다가 순천에서 빠져
보성, 장흥, 강진, 해남을 거쳐
드디어 해가 완전히 넘어간 다음에야 비로소 진도대교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진도읍 공용주차장 앞에는 미리 전화약속이 된 바 있는 힘줄님(본명 이현동)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힘줄님은 영남대 예술대학 국악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현재 진도의 국립국악원에서 대금연주자로 활동중인 젊고 재능이 뛰어난 예술인입니다. 국악 연주인으로서 산악자전거를 즐겨 타는 멋장이이지요.
드디어 광복절 새벽입니다.
알람 소리에 잠이 깨어 이런저런 준비를 합니다.
배낭에 하루 온종일 먹을 간식과 물, 각종 공구와 튜브를 점검합니다.
5시 정각에 모텔 앞으로 나오니 아직 캄캄한 거리 저편에서 자전거를 타고 기운차게 달려오는 힘줄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먼저 가까운 국밥집에서 가벼운 아침식사를 하고 나오니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냥 빗줄기 속으로 돌진하기로 하고 자전거 페달을 밟아 나가는데, 비는 불과 5분을 못 넘기고 기분 좋은 가랑비로 바뀝니다.
진도읍을 빠져나가 왕온이란 분의 무덤이 있다는 "왕무덤 고개"를 넘어서 운림산방(雲林山房) 쪽으로 달려갑니다. 이른 아침인데 높은 습도로 온몸은 눅눅하고, 무척 더운 느낌이 듭니다. 진도읍에서 6km 떨어진 거리에 있는 운림산방은 소치(小痴), 남농(南農) 등 이 지역의 허씨 문중이 배출한 기라성같은 화가들의 예술혼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조선시대 예술가의 멋과 우아한 분위기가 피부에 느껴지는 멋진 곳입니다.
이곳을 배경으로 그 유명한 영화 <스캔들>이 촬영되었다고 합니다.
배용준, 전도연이 한복을 입고 배를 타고 노니는 사진이 안내판에 올려져 있습니다. 아직 오픈을 하기 전이라, 입장료도 내지 않고 운림산방 내부를 두루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운림산방 뒤로 오르는 한 줄기 오르막 산길이 있으니 이름하여 첨찰산(瞻察山)!
그 쪽으로 오르는 업힐 코스입니다. 거친 느낌이 드는 특이한 산 이름입니다.
길 어구에는 <진도아리랑>의 발생지를 기념하는 참한 노래비가 하나 서 있습니다.
구불구불한 도로는 포장이 잘 되어있고,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길게 뻗어 있었습니다.
첨찰산 정상에는 진도기상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는 조망은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멀리 진도 앞 바다와 고깃배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섬 특유의 산길이 보이는데, 이는 자전거 라이딩 코스로도 제격입니다.
이제부터 첨찰산을 내려가는 길은 신나는 다운힐입니다.
바람을 가르며 쏜살같이 달려내려갑니다. 우리는 두 사람의 소년같습니다.
한참을 달려 내려오는데, 드디어 펑크가 나버렸군요. 바람 빠진 바퀴는 맥을 잃어버리고 비틀거립니다. 앞서간 힘줄님이 다시 되돌아와서 타이어 분리하는 일을 도와줍니다. 도로 위에서 우리 둘은 오손도손 정답습니다. 내려온 첨찰산 코스를 언뜻 올려다 보니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첨찰산을 뒤로 하고 길게 이어진 도로를 한참을 달려가면 바다가 갈라져서 길이 열린다는 기적의 바닷길이 보입니다. 하지만 제가 당도했을 때는 이미 밀물이 들어와 갈라진 바닷길은 사라진 후였습니다. 이 기적의 바닷길을 해외에 널리 알린 분은 주한 프랑스대사로 있던 삐에르 랑디라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분의 동상이 언덕 위에 서 있습니다.
이윽고 자전거는 돈지 마을로 접어듭니다.
이 마을은 원래 작고 보잘 것 없는 곳이었으나 수년 전 한 마리 진도개에 의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한 지역이 되었습니다. 대전으로 팔려갔다가 3개월만에 다시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아온 백구를 기억하시지요?
지금 이 백구는 죽어서 돈지 마을에 묻혔습니다. 백구의 주인인 할머니는 아직도 생존해 계십니다. 이 마을 주민들은 백구의 무덤을 고인돌 모양으로 만들어 마을입구 넓은 터에다 조성하고 동상까지 세워서 높이 기렸습니다. 이름하여 "백구공원"이라 합니다.
그런데 너무도 야릇하고 재미있는 광경은 그 백구 동상과 무덤이 있는 바로 그 앞에 보신탕 집입니다. 한 마리 훌륭한 개를 기념하는 공원을 만들어 놓고, 바로 그 앞에서 버젓이 성업중인 보신탕 집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개를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몸과 하나가 되도록 한다던 어느 분의 우스갯소리가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다시 돈지 마을을 떠나 다음 장소로 달려갑니다.
이윽고 안개 속에 가려서 이따금씩 나타나던 8월의 태양은 드디어 무서운 본색을 드러내어 머리 위에서 이글거립니다. 햇살은 바늘처럼 따갑게 느껴지고, 바람은 열풍으로 귓전에 불어닥칩니다. 숨이 콱콱 막힐 지경입니다. 진도의 마을은 가는 곳마다 진돗개 보존마을이란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진도의 개는 모조리 진돗개입니다.
그러고 보니 진도에 들어온 이후로 황구탕의 재료로 흔히 쓰이는 토종견의 모습은 한 마리도 못 본 것 같습니다.
진도의 시원한 개펄이 눈에 들어옵니다.
해초를 말리는 아낙네들의 손길이 한가롭기만 합니다. 이른 새벽에 라이딩을 시작했으니 이제 시장기가 슬슬 돕니다. 현재 시간은 10시 반, 다섯 시간이 넘도록 달리는 중입니다. 우리는 솔밭이 길게 이어진 바닷가로 가서 그늘진 곳에 자전거를 뉘어 놓고 드디어 헬멧을 벗었습니다. 간단하게 싸온 주먹밥과 밥 한 덩이를 중참으로 때웁니다. 주먹밥은 클로렐라 분말을 넣어서 뭉쳤고, 맨밥은 찬물에 말아서 준비해간 풋고추를 된장에 콱 찍어서 먹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맛있는 별미가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여귀산(女貴山)으로 오르는 업힐 코스입니다. 왜 이름이 여귀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자가 귀한 지역이었을까요? 아니면 여귀(女鬼山)의 바뀐 이름일까요?
이 여귀산 고갯마루에서 너무도 아름다운 전경을 포착했습니다. 완전히 수묵화의 한 장면 같지 않습니까? 대자연의 조화는 이처럼 놀라움을 줄 때가 많습니다.
드디어 진도의 맨 남쪽 바닷가 언덕에 위치한 남도국립국악원 앞입니다.
소리의 고장 진도에 세워진 이곳에서 우리 힘줄님이 대금(일명 '젓대')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국악원 앞에서 포즈를 취한 힘줄님의 당당한 모습입니다. 이 젊은 연주자를 많이 격려해 주십시오.
마침내 오늘의 마지막 업힐 코스인 지력산(知力山)으로 접어듭니다. 지력산 코스는 진도에서 가장 멋진 산악자전거 길로 힘줄님이 이 코스를 미리 개척해 두었습니다.
그리 세지 아니한 난이도였지만, 더운 여름날 이미 7시간 이상을 자전거를 타고 달려온 끝이라 그늘 한 점도 없는 산길을 오르는 일이란 쉽지 않았습니다. 숨은 턱에 닿고, 햇살은 등에 사정없이 내려꽂혔습니다.
그래도 이 고통스러움을 잊게 해주는 것은 바로 산과 산 사이로 빠끔히 바라다 보이는 진도 앞 바다와 섬들의 그림 같은 절경들입니다.
아, 드디어 진도읍 표지판이 보입니다.
무려 8시간을 달렸고, 총 77km를 오르막내리막으로 밟아 왔습니다.
어떻게 그 먼 길을 달려왔는지 생각하면 꿈만 같습니다.
우리네 인생 길도 이처럼 힘들고 어려운 구간들로 줄곧 이어져 있겠지요.
업힐에서 땀흘려 애를 쓰고 나면. 다운힐에서의 상쾌하고 보람 있는 시간을 만나게 됩니다. 자전거는 이렇게 삶의 진수(眞髓)를 그대로 맛보게 해줍니다.
여러분들도 언젠가는 아름다운 매혹의 섬 진도를 라이딩 코스로 선택해 보시면 어떨까요?
참고로 오늘 달렸던 코스를 구체적으로 다듬어 정리해 보겠습니다.
진도읍 - 남산(238.8m) - 사천리 - 운림산방 - 첨찰산 - 향동리 - 18번 국도 - 초하 - 초상 - 청룡리 - 돈지리 - 거룡리 - 송정리 - 죽림리 - 여귀산(457.2m) - 호랑이굴 - 상만리 - 석교리 - 인지리(부흥산) - 와우리 - 작은 와우동 - 지력산(해발 325.3m) 임도 코스 - 보전리 - 고야리 -염장리(대곡산 236m) - 포산리 - 진도읍
진도는 참으로 분위기 있고 아름다운 남도의 섬이었습니다.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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