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유명 관광지 테랫지의 호텔서 2일째 밤을 보내고 최종 목적지였던 울란바트로에서 동쪽으로 120키로 거리인 스태프 노매즈 캠프를 찾아가느라고 좀 혼이 났다. 이 곳 초원의 비포장로들은 마치 미로 같아 들어 갈때와 나올때 두 차례나 헤매기도 했다. 한 마디로 멀쩡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에 딱 좋은 코스였다고나 할까..귀로에 멀리서 목격한 일이지만 울란 바트로에서 두 관광객을 태우고 왔다 가던 승합차도 길을 잃고 도로 아닌 초원의 구릉지대를 한동안 오르내리다가 겨우 빠져 나가는 그런 곳이었다.
울란바트로에서 103키로 지점에서 17킬로인 비포장도로를 타야하는 이 곳을 찾아 가느라고 말문이 막히는 광활하고 인적이 없는 초원을 마치 "서부의 외로운 사나이"가 되어 필마단기로 달리며 길을 찾느라고 피곤하고 배곺은 상황에서 암담한 심정을 스스로 달래가며 어둠이 몰아 닥치는 밤 10시가 다 되도록 헤매다가 예정에도 없는 한 유목민 겔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도 했다.
곧 원고가 정리되는대로 이미 예고편을 올려 놓았었던 개인 홈피,
http://home.megapass.co.kr/~bae106/index.html
에 울란바트로의 이데르 게스트하우스에서의 세계 각국 남여 배낭족들과의 혼숙, 한 유목민 겔에서의 하룻밤을 보낸 얘기등등 까지 6박7일의 여정 상보를 올릴 예정입니다만 우선 화보중심의 얘기를 4회로 나눠 올려 봅니다.(맨 위 사진은 울란 바트로 교외의 강변 풍경)
숫자는 숙박 순서이고 노매닉 캠프 입구서 스태프 노매츠 캠프입구까지의 국도 한 중간부분의 상당한 거리는 그 날의 일정상 어쩔수 없이 히치 하이크로 차량에 편승하기도 했다.
항공요금이 불과 왕복 50만원인 울란바트로 행 에어로 몽골기를 탑승키위해 분당에서 이른 아침에 버스편으로 떠나 청주에 도착, 공항까지 15키로를 달려 탑승한 108인승 중형 여객기는 20%가까이나 좌석이 비어 있었다.
항공요금이 너무 싸서 음료 서비스에서 맥주는 없다는게 한국인 스튜의 설명이어서 대신 래드 와인을 두 잔이나 마시며 무료함을 달래야 했고 극히 간단한 샌드위치 기내식으로 아침을 먹었다.
건너편에는 한 곱상한 몽골인 젊은 부인이 사업가인 한국인 남편을 잠시 남겨두고 애기와 함께 몽골의 친정집에 다니러 가는 길이라고 했는데 모처럼의 귀국에 준비가 많아서였든지 꾀 피곤해 보였다.
귀국하는 날의 탑승시간이 아침 9시인점을 고려, 마지막 밤을 울란바트로에서 보낼 경우 새벽에 찬 이슬을 맞으며 15키로를 라이딩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아예 공항부근의 숙소를 미리 수소문해 공항 입구 주유소서 가리켜 준, 쇼스부얀트라는 이름의 단 한곳 밖에 없는 모텔(국내 모든 관계회사는 없는 걸로 알고 있었다.) 다인실의 한 배드를 예약했다.
그리고 큰 길로 나오다 만난 삼천리의 next 자전거를 타는 꼬마가 신기하게 보여 공항청사를 배경으로 잡아봤다.
이 소년은 한 동안 나를 따라 왔었고 6일뒤의 귀로에 공항쪽으로 달리고 있을때는 공교롭게도 공항 행 버스에 타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 밀고는 반갑다는 듯 냅다 소리치기도 했다.
원래 바이칼 원정때도 실력 발휘했지만 길눈이 밝기로 유명한 필자이나 외국인 전문인 이데르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가는데 애를 먹었다.
울란바트로 역 부근인 이 하우스의 홈피를 통해 예약을 하고 카드로 예약금까지 결재(불과 2달러 45센트여서 카드사에서 이 것이 도대체 무슨 요금인가하고 궁금해 할것이다.)하고는 약도를 참고로 찾아 갔지만 기준으로 생각했던 기차 철길이 실제로는 지선이 많은데다 도로도 빙빙 돌아가야 했고 또 '트레인 스테이션'(나중에 몽골 말로 왁샤라고 부르는 것을 확인 함.)이라는 영어를 알아듣는 사람도 없어 애를 먹으며 빗방울이 내리고 어둠이 시작되는 가운데서 좀 초조하게 헤맨끝에 겨우 찾아 낼수 있었다.
바로 저 1층 창문 왼쪽 벽에 내 침상이 있어 침상에서 창문을 여닫을 수 있었다.
매끈한 스타일의 중년신사인 주인장은 유일한 이 한국인을 반가히 맞아줬고 미리 선정해둔 한 방의 배드로 안내했는데 4~5개로 보이는 다인실 가운데서도 창문이 있어 괜찮게 보이는 방이었고 양쪽 벽에 두개씩, 서로 마주 보이게 놓여 진 2층 침대가 있어 도합 8명의 수용이 가능 한셈인데 내 침상은 창가 2층이고 맞은 편 2층에는 날씬하면서도 아주 저돌적인 가슴의 20살가량의 프랑스 미녀 침상이고 그 옆 역시 2층에는 일본 여행때도 보기 어려웠던 20대의 일본 미녀가 사용중이어서 아무래도 앞으로 한국인들도 많이 유치하기 위한 선전 목적으로 이 한국인 노짱에게 상당한 배려를 한 느낌이었다 .
위의 사진은 룸들 한가운데 마련된 휴게실에서 각국의 배낭족들이 마치 여행 동행인처럼 극히 자연스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울란바트로 시내는 붐비는 차량-특히 고물차도 많아 매연이 지독해 이 곳을 목적지로 택한 것이 후회될 지경. 허나 교외로 벗어 나자 그림같은 강변 풍경이 펄쳐 졌다.
멀리 보이는 열차는 두 기관차가 무려 80량의 화차를 끌고 있었는데 그래서 힘에 부쳐서인지, 아니면 철로 로반이 시원찮아선지, 육상선수의 뜀박질 정도의 저속으로 달리고 있었다.
또 이 곳의 교량은 콘크리트 상판이었으나 테랫지 같은 시골에서는 교량 상판이 시멘 콘크리트가 아닌, 못질 한 나무 판이어서 펑크가 날까 조심스러워 잔차를 끌고 건너기도 했다.
근교 시골도시며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접목시키고 있는 날락을 지나자 바로 태랫지와 빠까눌의 갈림길부근에서 두 모녀가 길 가에 마유주를 내다 팔고 있다.
지나가는 한 운전기사가 맛을 보고는 그냥 가 버린다.
사진만 찍은 것이 미안해 귀로에 남은 끝다리 잔돈 80 투그릭을 내 밀고 맛만 보자고 했더니 값이 2백 투그릭 이라는 한 사발을 건내 줘 감사하며 마셔보니 너무 신맛이 강해 도저히 마실 수 없었다.
그 들은 내가 너무 시어서 몹시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는 박장대소했다.
(원내는 딸내미가 찍어준 사진으로 뒤에 테랫지와 빠가눌로의 갈림길이 보인다. 바이칼 라이딩때 너무 삐깍 번쩍한 의상을 입고 가서 시기심을 유발, 봉변을 당한 것이 아니냐는 말도 나와 이 번에는 일부러 구닥다리 옷에 단돈 5천원짜리 덤핑품 자켙을 입고 갔다.)[아래의 7430(2회), 7432(3회), 7433(4회)호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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