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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바퀴로 떠난 일상탈출(2006 탐라정벌)

햇병아리2007.02.22 18:44조회 수 5507추천 수 24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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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다녀온 제주 일주 후기입니다.
재미없어도 원망사절!! ^^

두 바퀴로 떠난 일상탈출! ( 2006 탐라정벌 )

  내게 여행을 떠나는 것의 반대는 여행에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저앉아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선택이다. 하나를 택하면 하나를 버려야 하는...  더 좋은 것을 택하든,  덜 나쁜 것을 택하든 그나마 택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첫째 날(2006. 9. 13 : 수요일)
  10분후 제주공항 도착예정!  현지엔 가늘게 비가 내리고 있단다. 자전거 여행에 천적은 더운 날씨도 추운 날씨도 아니다. 바로 비다. 수하물을 찾아 한적한 곳에서 자전거를 조립하고 나니 다행히 비는 그쳤지만 노면은 젖어 있다. 시계를 보니 1시가 넘었다.  일단 점심을 해결해야 한다. 길가 허름한 칼국수 집!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지... 식당에 사람이 많다는 것은 맛있다는 반증이 아닌가.
제주도의 도로망은 잘 정비되어 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해안부터 해안도로, 중산간도로, 산록도로 등이 둥글게 띠를 이루고, 관광도로, 산업도로 등이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이어져 있다. 마치 고깔모자처럼 말이다.
  제주에서 가장 높다는 1100도로!   짧은 식사를 마치고 1100도로를 향한다. 내륙을 향해 얼마를 달리자 드넓게 초지가 펼쳐진다. 조금을 더 달리자 자동차가 거꾸로 올라간다는 신비의 도로, 소위 도깨비도로가 나타난다. 차들이 기어를 중립으로 놓고 서있다. 얼핏 거꾸로 올라가는 듯한데 별 감흥이 없다. 원리는 뭐 별거 없단다. 착시 즉 착각이란다. 사람의 눈은 가파르고 긴 오르막을 오른 후 그보다 덜 가파른 짧은 오르막을 오르면 마치 내려가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단다. 물론 내리막도 마찬가지다. 그걸 알고 봐서 그런지 조금 실망스럽기도 하고...  
  이제 본격적인 오르막이다. 15km에 이르는 긴 오르막!  비는 그쳤지만 자욱한 안개가 신비감을 더해준다. 초원을 지나자 주위는 어느새 침엽수림들이 좌우를 병풍처럼 가로 막는다. 100m 간격으로 해발고도를 표시해 놓았다.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노래 소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침엽수림은 또 어느새 활엽수림으로 변하고 그렇게 얼마를 올랐을까 또 침엽수림이 나타나고... 지루할만하면 어느새 변해 있다.
  서두르지 않고 오르고 오르니 정상이다. 정상엔 휴게소가 있지만 한산하기만 하다. 시간을 보니 3시가 넘었다. 구름에 가려진 한라산을 향해 사진을 찍고 하산을 서두른다. 오른 길을 계속가면 서귀포, 핸들을 돌려 제주를 향해 오른 길을 다시 내려온다. 오르막은 내리막의, 내리막은 오르막의 달라진 방향일 뿐이다.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호기심과 두려움과의 싸움에 산물이다.  낯선 세상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낯선 세상에 대한 두려움! 무언가에 대한 간절함은 두려움을 이기게 한다. 그리고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닐까. 그러나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지와 맞설 준비는 된 것이리다. 특히, 자전거 여행은 사전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한다. 자신의 실력에 맞게 하루 동안 가야할 거리, 코스, 들를 곳과 지나칠 곳 등 이동정보는 물론 어디서 잠을 잘 것인지 숙박정보도 사전에 모두 정해놔야 한다. 그렇지 않고 길을 잘못 들면 그 보다 더 큰 낭패가 없다.  자전거 여행에서 어디를 간다는 것은 곧 페달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해안도로에 접어들자 자전거 속도가 뚝 떨어진다. 자전거 여행에 있어 바람은 언제나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다. 그것도 앞에서 안아주는 바람이라면 차라리 외면하고 싶다. 얼마를 달리다 해안 쉼터에서 집사람이 싸준 간식으로 허기를 채운다. 남들이 보면 처량해 보일까. 몇 시간 전 공항! 그렇게 남겨진 집사람과 아이들을 문득 뒤돌아보자 서글픈 눈빛이 나를 쫒아오고 있다. 헤어짐은 만남을 기약한다고... 헤어짐이 길어질수록 만남에 간절함은 깊어지는 법!  아무튼 허기진 배는 맛을 바라지 않는다. 그냥 채워지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용정이라는 우물을 자주 본다. 빗물이 현무암 속으로 스며들었다 해안에서 우물로 샘솟는다. 물이 귀한 제주에선 그런 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몸은 벌써 쉴 곳을 스스로 알고 있는지 피로가 밀려오고 오늘의 목적지 '애월'에 도착한다.
* 여정 : 제주공항 - 도깨비도로 - 1100도로 - 제주시 - 이호해수욕장- 애월
* 이동거리 : 52.5km

둘째 날(2006. 9. 14 : 목요일)
새벽 6:30분
날씨가 좋아 다행이다. 더워지기 전, 바람이 심하지 않은 아침에 거리를 벌어 놔야 한다. 자전거여행은 시간과 거리와의 싸움이다. 예전과 달리 이번엔 관광지 위주로 코스를 잡아, 하루 이동거리를 가능한 짧게 잡았다. 그러나 바람이라는 예기치 못한 복병을 만나 조금은 걱정스럽다. 제주가 왜 삼다도인지 바람이 가장 먼저 알려 준다.
  오늘의 첫 목적지 한림공원을 향 한다. 도로는 해안선을 따라 잘 정비되어 있다. 육지를 가로 지르지도 바다를 건너뛰지도 않고 그 모양 그대로... 이른 시간인 때문일까 공원은 한산하다. 정원 청소를 빗자루 대신 공기를 분사해 날려버리는 것이 이채롭다. 제주는 내가 이방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라는 듯이 가는 곳마다 입장료를 요구한다. 한바퀴 둘러보고 다음 행선지 분재예술원을 향해 갈 길을 재촉한다. 잠시 해안도로를 버리고 내륙으로 들어서자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다.  초원엔 말들이 드문드문 풀을 뜯고 있다. 분재예술원은 여행 동안 입장료를 지불한 몇 안 되는 관광지 중에 하나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란 찬사 때문도 있지만, 그곳에 관한 사전지식이 조금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 분재예술원을 만들 당시 100년이 가도 발전하지 못할 이런 오지에 무슨 분재냐고 다들 그를 “두루외(미친놈)”라고 했단다. 그때 그는 “향기 좋은 꽃이 피면 언젠가는 벌과 나비가 찾아오겠지” 하는 신념으로 포기하지 않았다니... 그때 그 미친 사람이 만든 정원을 사람들은 지금 벌과 나비가 되어 찾아간다. 얼마 전 읽은“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란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볼 줄 아는 눈, 들을 줄 아는 귀가 없이는 나는 본 것이 없고, 들은 것도 없다.  워낙 환한 조명 속에 살다 보니 이제 우리는 좀 체로 제 그림자조차 보기가 어렵다.  도시의 밝은 불빛 속에는 그림자가 없다.  그림자가 없는 삶에는 그늘이 없다.  0과 1 사이를 끊임없이 깜빡거리는 디지털엔 그늘이 없다.  그냥 덧없는 인생들이 덧없는 생각을 하다가 덧없이 스러져간다.  도처에 바빠 죽겠다는 아우성뿐이다
  아우성 소리에 묻혀 덧없이 살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우리를  죽비소리처럼 화들짝 정신이 퍼뜩 들게 한다.   지금 발붙인 현실에서 자신이 바라는 세상으로 오를 수 있게 하는 사다리로써 책만 한 것이 또 있을까. 그래서 책이 좋은가보다.
   다음 행선지는 송악산 선착장에서 마라도행 배를 타는 것이다. 얼마를 달리자 길은 점점 좁아지고 2차선 포장도로가 어느새 농로로 변해있다. 어디서 길을 잘못 들은 걸까. 아무튼 이 바람을 뚫고 다시 되돌아가긴 죽기보다 싫다. 저 멀리 우뚝 솟은 산이 송악산(후에 알고 보니 산방산)일 것이라는 생각 하나로 갈림길을 만나면 감각에 따라 길을 택한다. 가다보면 뭔가 나오겠지.  설마 청주가 나올라고... ^^ 얼마를 달리자 밭에서 일하고 있는 아저씨 한분을 만난다. 선착장 가는 길을 묻자 사람이 반가운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신다. 아저씨와 헤어지자 갑자기 시골집에 전화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잠시 자전거에서 내려 전화를 하니 응답이 없다. 밭에 나가신 걸까 무심한 신호음만 울린다.
  다시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전혀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송악산 마라도유람선 선착장! 파도가 너무 높아 마라도행 배가 출항할 수 없단다. 이번 여행의 최대목표는 국토 최남단에 바퀴 자국을 남기는 것이었는데...  한순간에 무너진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 중문 관광단지를 향한다. 바닷바람이 얼마나 센지 자전거가 휘청거린다. 바람에 실려 온 모래들이 팔뚝과 허벅지에 침을 놓듯 콕콕 찌른다.  바람 부는 곳에 지어 놓은 까치집은 바람을 견딘다고 한다. 이 바람이 나를 시험하는 것이리라.  용머리해안공원을 지나 산방산, 제주조각공원을 둘러보고 중문 관광단지에 도착한다.
   ‘하느님의 연못’ 천제연! 그곳에 가기 위해선 자전거와 잠시 이별을 해야 한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자전거와 함께 있을 땐 지금의 내 복장이 전혀 쑥스럽지 않았는데 자전거를 맡기고 혼자 걸으니 왜 이리 쑥스러운지... 수영복 입고 수영하다 그대로 거리로 나온 느낌이랄까. 가끔 남들은 내게 묻는다. 왜 자전거 타는데 그런 복장이어야 하냐고... 글쎄! 수영하는 사람한테도 그렇게 물었을까. 왜 수영복 입고 수영하냐고...
  아무튼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믿음이 나를 용감하게 만든다. 가끔은 정면 돌파가 가장 쉬운 법이다. 헬멧을 모자로 바꿔 쓰고 카메라만 들고 나선다. 천제연 폭포로 내려오니 시원한 그늘이 한결 마음을 상쾌하게 해준다.  언제나 시끌벅적한 중국 관광객들만 빼고 말이다.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세수도 하고 한자리 잡고 앉으니 올라가기가 싫다. 그때 갑자기 환호성이 터진다. 처음 누가 부탁을 했는지 중국 관광객이 한국 아가씨 둘과 함께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자 다른 사람들이 너도 나도 돌아가며 찍어 달라 덤빈다. 족히 이십 명이 넘어 보이는데... 그 아가씨들 겉으로 웃고 있지만 속으론 울고 있나보다. ‘미치겠네.’라는 말이 내게 들린다. 요즘 중국에서 韓流열풍이라더니  그 아가씨들한텐 寒流가 흐른다.
  중문 관광단지를 빠져나와 월드컵경기장을 둘러보고 늦은 점심을 해결한다. 뉴스를 들으니 대만부근에 태풍이 올라오고 있단다. 지도를 펼쳐보니 성산을 오늘의 최종목적지로 한다면 이제 반밖에 못 온 셈이다. 하필 이럴 때 태풍이라니. 마라도에 갈 수 없던 것도 결국은 저 태풍 탓이리라.  외돌개, 천지연폭포, 정방폭포를 둘러보는 동안 고민이 생긴다. 내일 아침 성산 일출봉에서 해돋이를 보려면 무조건 성산에서 일박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속도라면 도저히 불가능 하다. 또 선택의 시간이다. 결국 바람이 강한 해안도로를 포기하고 중산간도로를 택한다.
  경치야 해안도로에 비할 바가 못 되  지만 바람이 훨씬 덜하니 평속 35km를 유지한다. 그래 이런 속도라면 해떨어지기 전 성산입성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내 체력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일단 20km를 달리고 10분 휴식을 원칙으로 성읍민속마을을 향한다.
  성읍민속마을은 무료다. 민속마을에서 실제 현지인이 일상생활을 한다. 가까운 집에 들어가니 안내하는 사람이   없다. 주인 없는 집을 기웃거리듯 둘러보니 뭐 별거 없다. 집을 나서려는데 특유의 제주도 사투리가 들려온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설명을 들으니 전혀 새로운 느낌이다. 더 안으로 들어가니 똥 돼지가 있다. 돼지우리 근처엔 반드시 감나무와 긴 막대기가 하나 있단다. 감나무는 이곳은 볼일을 보는 곳이니 눈길을 주지 말란 뜻. 긴 막대는...  옛날 제주에선 사람의 배설물이 돼지의 음식물로 공중 투하된 셈이다. 배설물이 사람으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돼지의 음식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어떤 화학적, 생물학적 반응도 없이... 아무튼 그런 재탄생의 과정을 기다리지 못하고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것을 예방하는 용도라니 당시엔 막대기가 요긴한 물건이었다. 지금은 똥 돼지가 제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예로 흑 돼지가 남아 있을 뿐...
성산을 몇 키로 남기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다. 내일 해맞이를 생각하면 일출봉 바로 아래까지 가야한다. 성산을 지나자 주위는 완전히 어두워진다. 가로등에 의지해 얼마를 달렸을까. 드디어 저 멀리 일출봉에서 조명등이 깜빡이고 핸드폰에선  “My way”가 흘러나온다. ꁔꁕ‘아주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다 볼 곳 없네. ꁖꁟ 정말 높이 올랐다 느꼈었는데 내려다 볼 곳 없네. ........’

* 여정 : 애월 - 한림공원 - 분재예술원 - 송악산- 산방산- 조각공원 -    <돌하르방! 오른손이 높으면 문관, 왼손이 높으면 무관>    천제연폭포- 월드컵경기장 - 외돌개-천지연폭포-정방폭포- 성읍민속마을 - 성산읍  * 이동거리 : 106.6km

세째 날(2006. 9. 15 : 금요일)
  새벽 4:30
어제 무리한 탓인지, 아니면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탓인지 온몸이 말이 아니다. 그러나 성산 일출봉의 해맞이도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밖으로 나오자 생각보다 아침바람이 차다. 등산로로 접어들자 가로등이 잘 설치되어 있다. 무릎이 약한 내게 계단은 최악이다. 쉬엄쉬엄 정상에 오르니 어느새 어둠은 걷히고, 발아래 넓은 분화구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왼쪽으론 손에 잡힐 듯 우도가 보인다. 점점 사람들이 많아지고 어둠이 갑자기 화들짝 밝아온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끝내 둥근 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구름사이로 붉은 기운만 비추고는 그것으로 그만이다.
   아쉬움에 그렇게 앉아 있으니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 복장만으로도 자전거를 금방 떠올린다. 그들도 내 복장을  보고 그렇게 알았으리라. 대학생 3명이 군 입대를 앞두고 서울부터 9일째 전국일주 중이란다. 그들이 대견하기도하고 젊음이 부럽기도 하다. 그 나이 때 난 생각만하다 이제 40이 되어 이 짓거리다. 그러나 한편으론 조금은 위안이 된다. 한사람 한사람의 삶을 놓고 보면 누가 중심이고 누가 변방이라 할 수 있겠는가.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는 자기 자신이 중심인 것이지. 다만 중심잡기가 힘들다 뿐이지.
서로 무사히 일주를 마치기를 바라며 하산을 서두른다. 무릎이 약한 사람에겐 등산보다 하산이 더 힘들다.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우도행 유람선에 몸을 싣는다. 날씨 탓일까 유람선은 한산하다. 시계방향으로 얼마를 달리자 한 무리의 해녀들이 몰려있다. 기념촬영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별로 호의적이지 않다. 바람을 헤치고 해안선을 따라 돌자 멀리 등대가 보인다. 점점 바람이 심해지고 금방 비라도 쏟아 부을 듯 잔뜩 찌푸리고 있다. 지난여름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을 해수욕장엔 몇 쌍의 연인들뿐 차라리 을씨년스럽다. 제철이 아니라 그런지 우도엔 별 볼거리가 없다. 선착장에 도착하니 유람선에서 안내방송이 나온다. 지금 이 유람선 이후 운항 일정은 날씨 관계로 장담할 수 없으니 빨리 승선하라는 요지다. 대만근처에 있다던 태풍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 가는가보다 생각하니 조금은 걱정이 된다.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는 유람선이 성산에 도착할 즈음 폭우수준으로 변한다.
  오늘은 제주에서 숙박하고 내일 한라산을 가볼 생각이었는데... 여객터미널에서 10분정도 기다렸지만 폭우가 잦아들 기미가 없다. 또 선택을 해야 한다. 이 폭우를 뚫고 제주를 향하든 비가 잦아들 때를 무작정 기다리든... 물론 배낭은 방수포로 쌌고 우의도 있지만 이런 폭우라면 별 소용이 없다. 30분을 더 기다려 봤지만TV에선 태풍에 철저히 대비하라는 방송 뿐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매점에서 비닐봉지를 얻어 배낭 안에 비에 젖어선 안 될 옷가지며 핸드폰 등을 다시 한번 싼다. 마지막으로 우의를 걸치고 수많은 사람들의 걱정스런 눈빛을 뒤로하고 폭우 속으로 뛰어든다. 멋있어 보이지 않을까하는 착각과 함께...^^  
  얼마 못가 이내 양말이 젖고 바지까지 젖어버린다. 다행히 자전거 도로가 잘 개설되어 있어 별로 위험하지는 않다. 비바람을 뚫고 가려니 속도가 나지 않는다. 가는 길에 들르기로 했던 만장굴도 그냥 지나친다. 얼마를 달리자 허기가 밀려온다. 가까운 길가 이름 없는 슈퍼에 들어서자 주인아줌마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맞이한다. 쉼 없이 계속되던 자가발전을 멈추자 한기가 밀려온다.   본능적으로 옷을 갈아입고 따뜻한 우유를 마시자 한결 좋아진다. 이제 제주입성이 문제가 아니라 내일이 더 큰 문제다. 일단 가는 데까지 가면서 생각해 보자. 다시 길을 나서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오늘은 그 말이 왜 이렇게 공허한 말장난처럼 들릴까.
  조천 읍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태풍이 북상하고 있다면 내일은 오늘보다 더 악화 될 테고... TV를 보니 태풍이름이 ‘산산’이란다. 무언가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이다. 항공사에 전화를 하니 내일 운항은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지만 모레는 장담할 수 없단다. 다행히 오후에 몇 자리가 남아 있단다. 그나마 항공권을 구하고 나니 조금은 안심이다.
  제주시내에 접어들자 다행히 빗방울은 조금 자자들었다. 제주는 박물관 천국이다. 기억 할 수도 없는 수많은 박물관들... 몇몇 박물관을 둘러보고 삼성혈을 지나 용두암에 도착한다. 용두암!  차라리 용두사미가 생각난다. 초등학교 시절 책받침에서 본 용두암의 그 신비로움은 어디에도 없다. 내 머리가 커버린 탓으로 돌리기엔 그 규모가 너무 초라하다. 공항이 가까워 용두암 근처에  민박을 잡는다. 종일 비와 땀으로 젖은 몸을 따뜻한 물로 씻을 때의 그 노곤함  을 샤워꼭지는 알고 있을까. 자꾸만 자꾸만 샤워꼭지는 내 몸을 향한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주위는 벌써 어둠이 내리고 다시 추적추적 비를 뿌린다. 우산을 빌려 용연과 용두암에 바람을 쐬러 나가보니 휘황찬란한 조명 빛이 낮과는 또 다른 세상이다.
  홀로 맞이하는 낯선 세상에서의 저녁!  자전거 여행 할 때마다 밤의 느낌은 매번 다르다. 첫 날은 앞으로 찾아올 낯선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둘째 날은 오늘보다 더 새로운 무엇인가 있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셋째 날은 처음 가졌던 기대를 다 채우지 못한 안타까움으로...  마지막 날 밤은 이번 여행도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아쉬움으로... 그  중에 마지막 날은 조금 더 특별하다.   아마 아쉬움이 가장 오래 남는 감정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마지막 날의 음주는 그 동안 절제에 대한 보상일 수도 있고, 아쉬움을 달래는 혼자만의 작은 의식일수도 있다. 아무튼 지금은 이런 아쉬움이라도 즐기는 것이 최선이다.
* 여정 : 성산 - 우도 - 조천읍 - 삼성혈- 용연- 용두암    * 이동거리 : 49.3km

넷째 날(2006. 9. 16 : 토요일)
  버릇이란 참 무섭다. 10시에 알람을 맞춰놨지만 몸은 매일 일어나던 그 시간을 벌써 알고 눈이 떠진다. 창밖을 보니 다행히 폭우는 쏟아지지 않는다. 이슬비를 맞으며 공항에 도착, 자전거를 분해해 비행기에 탑승하자 바로 이륙한다. 점점 고도를 높이자 저 멀리 한라산이 흰 구름을 머리에 쓰고 있다. 사람살이 아무리 바삐 돌아가도 산은 언제나 거기에 그대로 있다. 지난 며칠동안 단 한번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더니 끝내 허락하지 않는다. 아직은 때가 아닌 때문일까.  이렇게 태풍에 쫒기 듯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그런 아쉬움 속에서 집 생각을 하니 청주가 가까워 옴을 두근거리는 가슴이 먼저 알고 있다.  

* 여정 : 용두암 - 제주공항 - 청주공항

  가진 것을 내려놓아야 새로운 것을 쥘 수 있다고들 한다.  애써 얻은 것들을 내려놓는 것이, 익숙한 것들에 대한 편안함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아무래도 쉬운 일은 아니다.  여행도 그런 것이 아닐까.  여기에 집착하면 거기에 갈 수 없으니 말이다.
  
○ 출연 : 67년식 엔진, 자전거, 휴대용펌프, 공구 셑, 반장갑, 상의 3, 반쫄바지 3, 방풍자켓, 티셔츠, 반바지, 헬멧, 양말 3, 휴대폰 및  충전기, 칫솔, 반수건, 손수건, 지갑(신분증, 현금카드), 비상금, 필기도구, 고글, 속도계, 깜빡이, 물통, 전국지도, 관광안내지도, 클립신발, 두건, 비옷, 배낭, 썬 크림, 디카, 자전거이동보관함
○ 총 이동거리 : 208.4km
○ 소요경비 : 360,000원/3박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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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 아~~정말 좋네요..
    저도 제주도는 훈련으로 4번, 신혼여행 1번 이렇게 가봤지만 자전거 일주라...
    저도 꼭 한번 도전하고 싶네요..
  • 3년 전에 제주도 해안일주 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 글 읽으면서 제작년 해안도로 일주했던 기억이 아련히 납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후기 정말 잘 읽었습니다 많은것을 느끼게하는 글이었습니다...
    올핸 정말 1100도로 넘어볼 생각입니다... ^^
  • 제주 다녀온것이 한달도 안되는데, 바다 그 파란향이 다시금 한가득 내게 달려오는것 같네요...
    볼 줄 아는 눈, 들을 줄 아는 귀.
    본 것이 없고, 들은 것도 없다...
    아~ 다시 또 달리고 싶네요... 글 잘 읽었읍니다...
  • 이제서야 글을 읽고 댓글을 다네요....
    홀로이 라이딩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저도 기회가 되면 꼭 한번 가보고 싶군요.
    다음 기회에는 좋은 날씨를 만나 고생하신 것을 보상 받으시길....
  •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용용아빠
2024.06.17 조회 64
treky
2016.05.08 조회 673
Bikeholic
2011.09.23 조회 8111
hkg8548
2011.08.04 조회 7161
M=F/A
2011.06.13 조회 6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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