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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Biking2006.01.26 13:05조회 수 520추천 수 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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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소리 들리지 않는 곳이 어찌 고향이랴  - 박형진의 부안타령 -


엿 고랴 두부하랴, 술 해 넣고 떡 하느라...

아랫목 술 괴는 소리에 잠이 깨 보면 명절 옷을 지으시느라 주무시지도 않고 호롱불 가까이 바느질을 하시는 어머니를 볼 수 있었다. 뭔가 그냥 자기가 서운해서 자던 내 자리를 내놓고 어머니 옆으로 옮겨가서 누우면 어머니는 아버지 옷 짓던 것을 내게 덮어주신 채로 바느질을 하신다.

가려운 몸뚱이에, 이리저리 돌려가며 바느질 하시는 풀 먹여서 사각거리는 광목천은 꺼글꺼글하여 시원하기 그지없었고, 풀 하얀 그 냄새와 어머니의 고소한 냄새, 흐릿한 호롱불 밑에서 콧소리로 뭔가를 흥얼거리시는 것들이 어우러져 다시 내 잠을 재촉한다. 아슴한 기억 속에 멀게 닭 우는 소리도 들려 왔다.

아버지의 옷과 큰형님의 옷은 그렇게 지으셔도 나머지는 사서 입혔다. 특히 내 옷은 맨날 까만 학생복이다가 좀 커서는 고리땡 바지에 잠바였다. 물려 입힐 동생은 없고 한참 클 나이라 옷을 항상 큼지막하게 사 입혀서 소매 바지를 두 번씩 걷어도 우장 입은 것처럼 보인다. 겨울 내내 까만 물들인 버선을 신고 형님의 옷을 줄여 만든 고무줄 바지에 학생복 윗옷 차림이다가 설빔이라고 사온 옷이 구럭같이 크기만 하니 어쩌다가 둘러보는 혁띠나 모자, 앞코가 반절이나 눌러지는 운동화도 맘에 안 들기는 매 일반이었다.

그러나 내 기억에 추석 설빔을 안 사 입었던 적도 없는 듯하다. 그도 저도 못 하는 내 또래에 비하면 호강에 겨운 시절인 셈이다.

엿 고랴 두부하랴, 술 해 넣고 떡 하느라 대복 무렵이면 곡식도 많이 들고 나무도 많이 드는데 일 년내 쌀밥 한 번 제대로 못해 먹다가도 이때만큼은 쌀 한 가마씩을 들여 놓아 아버지는 식구들을 참 든든하게 하셨다. 어느 핸가 무슨 일이 잘 안 되셨던지 잠자리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쌀 때문에 걱정하시는 말씀을 듣고 어린 마음에도 나는 몹시 불안했다. 떡도 보리떡만 할 테고 밥도 보리밥……이런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그런 걱정을 오래 하게 놔두지는 않으셨다. 실제로 우리 집이 어려워져서 명절 쌀 걱정보다도 평일 보리밥 걱정을 하게 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였으니까.

내가 좀 커서 집에 나무를 해 대게 되었을 때 떡 찌는 나무나 멧밥 짓는 초하룻날 새벽에 쓸 나무는 감나무 골 이라고 하는 먼 산에 가서 바짝 마른 장작을 해 왔다. 나뿐이 아니고 동네 나무꾼이 다 그랬다. 좋은 나무 때서 떡 찌고 밥 하는 것만을 중요하게 여겼다기보다는 나무가 귀한 때라 엿 고는 것처럼 나무가 많이 드는 것은 끄렁 장작 좀 덜 말린 것을 때서 진진하게 해야 되고, 아무래도 밥은 좋은 나무 때서 연기 불티나지 않게 단시간에 해야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무도 명절 대목 나무라 해서 소용에 맞게 한 열흘 정도 바짝 해 대서 쌓아 놓고 엿도 고고 떡도 찌는데, 항상 떡 찔 때 떡 안 익어 애먹는 집이 있으니 우리 고모할머니 집이었다.

살림 주관하던 고모할머니의 큰며느리는 인공 때 빨치산으로 죽은 시아제의 귀신이 씌여 신굿을 여러 번 했으나 눈에 항상 이상한 빛이 흐르고 뭔가 혼자 중얼거리기 예사였는데 가리는(금하는) 것이 많고 걱정이 많아서 어는 땐가 세어 보니 걱정이 서른 한 가지더라!

심지어 떡 안 익는 것도 걱정이어서 떡 할 때마다 오줌 싼 애도 못 들어오게 한다고 부엌 바라지 처닫고 그것도 모자라 문 앞에 금줄 까지 쳐도 시루밴이 터지고 떡이 설었다. 그 또한 큰 걱정이 아닐 수 없던 것이다. 섣달 그믐날 고모할머니 집 떡 찌네 하면 어머니는 말듣는다고 나에게 그 집 문 앞에 가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하시곤 했다.

섣달그믐, 이른 아침부터 남자들은 어울려서 돼지를 잡아 한 사람이 한 다리씩 짓을 들고 다시 그 사람 책임 아래 여러 사람이 어울려 한두 근씩 나누어 집에 가져가서 설 쇨 준비를 한다. 이 고깃값은 보통 여름에 보리로 계산하기로 한다.

이 날 배 있는 사람들은 긴 대나무 베어다가 기를 있는 대로 다 내다 꽂고 물이 들어오는 때를 가늠해 고사 모실 준비에 바쁘다. 생기복덕生氣福德 가려 뽑은 당산제 모실 화주는 첫새벽부터 찬물에 목욕을 하고 제사장을 보러 오십여 리가 넘는 줄포장을 간다.

눈이 녹아 마당이 질퍽거리는 집은 앞장불 자갈을 담아다 깔아야 하는 것도 이 날 일이요, 바쁜 안식구들을 위해서 물질통 지고 물을 길어 물항마다 가득 채워 주는 것도 이 날 남자들의 몫이다. 제사 음식을 따로 해 놓고 한 접시 다시 담아 먼저 이웃집에 돌리는 것은 어머니들 일이고, 객지 나간 식구들을 기다리며 하루 종일 떠들썩하여 먹지 않아도 배부른 날이 이 날이다.

아마도 내가 열아홉 살 때였던 것 같다. 그 때까지 집에서 강의록을 사다가 검정고시 공부를 했는데 남들 다 먹는 서울물을 먹고 싶은 핑계로 그랬던지 공부한답시고 서울을 갔다. 공부하러 간다고 했으니 공부를 해서 금의환향을 해야 할 텐데 그러나 혼자 하는 강의록 공부가 될 턱이 없었고, 돈도 좀 벌어 보고 싶은 생각에 이것저것 기웃거려 보았으나, 남의 밑에 매여서 그제사 무슨 기술을 배우기는 또 싫었다.

그래서 어찌어찌 하다가 시작한 것이 남에게 구애받지 않는 고물 엿장수였고 한나절 정도만 리어카를 끌고 벌지도 못하는 장사를 하면 오후에는 강의록 공부 대신 종로쯤에 나가 데모 구경하는 것으로 공부를 때웠다. 유신 정권 무렵이었고 나는 공장 다니는 셋째 형 밑에 있었다.

그 때 나를 데리고 다니며 여러 군데 시국 강좌나 모임에 기웃거리게 하며 귀동냥을 시켜 준 누님이 한 분 있었는데 내게 쏟는 정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직 학생 신분이었지만 없는 돈 쪼개서 끼니때면 밥 사주고 술 사주고 차비 주고 책 모아서 주고, 그 때 금서로 묶여 있던 신동엽의 장시「금강」을 어디에선가 베껴다 주어서 보게 한 것도 그 누님이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나를 불러 앉히고 정색을 하고는 하는 말이 ‘농민이 농촌에 있어야지 서울에 있을 필요 없다’는 거였다. 이미 그의 말뜻을 알아들을 정도의 의식이랄까 그런 게 있던 차에 그것은 새삼 내 자신의 일생을 결정하는 어떤 충격 같은 것이었다. 그에게는 두말이 필요 없는 권고였고 나로서는 다시 의심해 볼 필요 없는 결정이었다. 나는 시골로 내려와서 농민운동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 다음 한량 같은 고물장수를 때려치우고 진짜 고생으로 돈을 좀 벌어 볼 생각으로 어느 연립 주택 짓는 데로 난생 처음 노동일을 나갔다. 공교롭게도 슬라브를 치는 날이어서 난생 처음 질통을 져야 했다.

그 날 하루 어떻게 일을 마쳤는지 모르겠다. 아마 속으로 울기를 여러 차례 했을 것이다. 나뭇지게와는 달리 요령이 생기지 않았는데 무거운 질통을 지고 남에게 맞춰서 삼층 바라시를 뛰어 오르내리는 일은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힘써 내 몸뚱이로 진짜 적은 돈이라도 벌어 보겠다는 각오로는 너무나 힘든, 그러나 결코 중간에서 그만 둘 수 없는 인생의 승부와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하루를 버팅겼을 뿐이다.

그러나 그 이튿날 다시 나가고 또 나가고, 동트면서 나가야 되는 겨울 공사판 일을 그렇게 스무 날을 나가서 연립 주택이 다 지어졌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계산을 해주지 않아서 이번에는 몇이 어울려 상계동 산꼭대기의 십장 집으로 매일같이 돈을 받으러 다녀야 했다.

그렇게 어렵게 받아낸 돈이 십사만 원이었다. 하루에 칠천 원짜리 노동일이었던 셈이다. 어연간 설이 돌아와서 섣달 그믐날 새벽, 집에 내려올 준비를 마치고 나는 용산역으로 나갔다. 좌석이 있을 턱이 없고 두 시간 줄을 서서 구한 것이 입석이었다. 처음엔 누구나 다 그러했다지만 집에 내려간다는 설레임으로 전날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어찌어찌 겨우 다리만 싣고 오는 느낌인 미어터지는 열차를 타고 곤욕을 치른 것도 나에게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김제역에서 내려 부안 격포를 왔을 때는 날이 어두워진 지 오래라서 차는 이미 끊어진 상태였다. 할 수 없이 군데군데 덜 녹은 신작로의 눈을 등 삼아 이십 리 산길을 걸어올 수밖에 없었다. 집에 온다는 일념 때문이었는지 무서운 밤길을 무서운 줄도 모르고 걸어왔는데 양 손에 짐을 든 탓이었는지 온몸이 땀으로 목욕을 한 듯 했다.

인제 저 숯구덩이 미친년 잔등만 돌아서면 동네의 불빛이 보이는 것이다. 아버지 산소가 바로 그 곳에 있고 좀 더 가면 증조할머니 산소도 있는 곳이다. 그 미친년 잔등이란 산모롱이를 돌아섰을 때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리고 말았다.

덩기덕 덩기덕 덩기덩 덩기덩…….
불빛보다도 먼저 바람을 타고 귓전을 파고드는 아련한 풍물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섣달그믐, 객지에 나갔다가 칠흑 같은 어둠을 밟고 산모퉁이를 돌아 어디메쯤 왔을 때 풍물 소리 들리지 않는 곳이 어찌 고향일 수 있을까.
뜨거운 눈물이 내 볼을 타고 흘렀다.

내가 굿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였고 굿을 배워서는 섣달그믐이면 어김없이 굿을 친 것도 그 때부터였다. 그러나 돌아와서 하는 농사일이나 농민운동은 결코 굿 치는 일처럼 되어 주지는 않았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이어서 집집마다 등이 내걸리는 섣달그믐의 그 어두운 골목을 매귀굿이라 하여 동네사람들이 굿을 치고 들어오면, 어머니는 하루 종일 장만한 음식 안주와 걸러 놓은 술을 내서 굿패들을 대접하시곤 하셨다. 집집마다 밤새 그렇게 굿을 치면서 굿패가 고살을 휘돌아 나가면 누구네 집 낯선 손님이 오는지 멀리 개 짖는 소리가 나고 한숨이나 붙이셨는지 꼭두새벽녘 어머니는 다시 부엌에 나가셔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메를 지어 차례 준비를 하셨다.


이 글은 박형진의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소나무 출판사)에서 옮겨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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