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져서 죄송함돠... 구럼 시작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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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 삼십분...온씨는 알람소리를 온 몸으로 들으면서 잠자리에서 튕겨나왔다. 겨우 세시간 남짓 눈을 붙이고 일어난 터라 자꾸만 이불위로 엎어지려는 몸뚱아리를 가까스로 일으켜 세우는 온씨. 그러나 떠지지 않는 눈을 부비면서 베란다 문을 열고 전날 챙겨두었던 장비가방과 자전거를 끌어내는 동안 온씨의 몸뚱이는 일년 남짓 만에 처음 떠나는 개척질의 흥분에 압도되어 신기할 정도로 빨리 제 컨디션을 회복하고 있었다.
온씨가 집을 나선 것은 새벽 네시 오분... 아직 깨어나지 않은 도심을 묘한 흥분 속에 가로질러 온씨는 어느덧 영동 고속도로로 접어든다. 두시간이 채 못되어 정병호님과 만나기로 한 횡성 휴게소에 도착했다. 여섯 시를 갓 넘긴 이른 아침 횡성 휴게소는 약간 황량하기까지 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염려했던 비는커녕 햇빛이 내리쬘 기세다. 전날 비올거라며 약을 올린 바모씨와 토모씨에게 그 신새벽에 당장 전화를 걸어 이 비보를 알려주고 싶음 마음을 온씨는 겨우 겨우 억누른다. 차 속에서 늦봄의 따스한 아침 양기를 온몸에 받다보니 졸음이 쏟아졌다. 한시간을 달게 잤다. 이로써 온씨의 몸은 완벽하게 모든 피로를 씻고 최상의 컨디션을 회복했다.
일곱시가 넘어서자 정병호님이 새 애마를 타고 휴게소에 나타난다. 반갑다. 온씨는 정병호님이 새 자전거를 타고있는 것을 그날 처음 보았다. 산악자전거꾼들에겐 너나 없이 정도는 다르지만 자전거라는 기계를 구성하는 쇳덩어리들의 품질과 외관, 제조사의 명성 등등에 대한 욕심이 있기 마련인데, 이 별만 보고 사는 노청년은 도무지 그런데 관심이 없어 보다 못한 주변 자전거꾼들이 하나씩 부품과 프레임을 갹출(?)하여 번듯한(!) 자전거를 한 대 조립해 주었던 것인데, 온씨는 정병호님이 그 애틋한 사연의 자전거를 가지고 나온 것을 그날 처음 본 것이다. 그의 스타일을 너무나 잘 알고있는 온씨는 럭셔리 뉴 머신 옆에서 어색하게 웃고있는 그가 한없이 해맑아 보였다. 그리고 다운힐 자전거에만 집착하느라 정작 그의 새 자전거에 부품 하나 보태지 못했던 자신이 약간은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여간, 정병호님의 새 자전거는 전혀 그의 스타일과는 어울리지 않게 가볍고, 럭셔리하고, 쭉쭉 잘 나갔고, 그의 스타일과 너무 잘 어울리게 청소상태는 심히 불량스러웠다.
“밥뭅시다.”
두 사람은 조미료 성분이 재료의 반은 족히 넘을 것 같은 순두부백반과 황태해장국을 잽싸게 먹어치운 다음 서둘러 산행 출발점인 운두령을 향해 차를 몰았다. 산불감시원이 출근하기 전에 장비를 꾸려 능선에 들어서야만 한다. 5월1일부로 국립공원 입산금지가 해제되었다고는 하나, 혹시 모르지 않는가..... 그러나 이 기우는 곧 현실이 되어 두 사람의 발목을 잡았고, 결국 30여분을 길 없는 협곡으로 우회하는 고통을 두 사람에게 안겨주게 된다.
운두령 정상에 도착한 것은 8시30분. 바람이 셌고 인부 서너명이 목조 전망대를 만드는 공사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홉시 전에 도착했다고 안도하면서 차에서 내려 자전거를 끌어내리려는 순간, 산불방지라고 쓴 빨간 조끼를 입은 50대 중반쯤의 사내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맞은편 계방산 등산로 초입에 붙어있는 플레카드로 눈길을 돌렸다. 아뿔사!
“산불방지! 5월 15일까지 입산금지”
온씨는 저 빨간조끼의 사내를 따돌리지 않고는 일년을 기다린 숙원의 능선 개척질을 꼼짝없이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음을 알아차린다. 안경 너머로 날카롭게 그들을 응시해오던 빨간 조끼의 사내는 그들이 차에서 엉뚱하게도 자전거를 꺼내자 짐짓 경계의 빛을 누구러뜨리고 묻는다.
“아이구 자전거 타실려구?”
정병호님이 자포자기한 듯 대답한다.
“예.”
“엊그제도 여기서 한분 자전거 타고 가시든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그럼 그들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이 능선을 자전거로 갔단 말인가? 그럼 자전거 타고는 입산금지를 어겨도 된다는 말인가? 온씨는 한줄기 희망의 빛이 비쳐지는가 하여 빨간조끼 사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말인즉 누군가 서울서 혼자 도로로 자전거를 타고 와서는 속초로 가는 중이라며 이 운두령 고개를 넘어갔단 말이었다. 그럼 그렇지... 이 빨간 조끼의 사내는 우리가 등산객인 줄 알고 딱 걸렸다 싶어 다가왔다가 자전거를 꺼내는 걸 보고 도로로 자전거탈 요량으로 온 줄 착각한 모양이다.
빨간 조끼의 산불감시원은 두 사람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풀고 자전거가 얼마냐, 어디서 왔냐, 등등을 물어댔다. 초조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건성건성 대답하면서 자전거 탈 준비를 마친 다음, 드디어 온씨와 정병호님은 고민에 빠진다. 작전회의에 들어갔다. 일단은 들이대보는 걸로 의견을 모으고 빨간조끼의 사내에게 다가간다.
“저... 실은 저희들이 ...”
이제 막 분주히 문 열 채비를 하고 있는 노점 천막 뒤로 분명히 분명히 보이는 등산로를 가리키며 정병호님이 말을 이었다.
“... 사실은 저리 갈 거거든요...”
빨간조끼의 사내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저길 자전거로 간단 말이냐, 어디까지 갈거냐, 등을 물어대다가 이내 자신의 본연의 임무를 깨닫고는 단호한 표정과 말투로 되돌아와서 잘라 말했다.
“안돼요.”
그들은 담배를 안피우기 때문에 화기를 소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면서 선처를 부탁했으나 빨간조끼의 사내는 막무가내였다.
"목사님이 와도 안돼요"
온씨는 여차하믄 담뱃값 정도는 슬쩍 찔러줄 각오를 하고 이번 한번만 눈감아 달라고 애원하면서 빨간조끼의 사내를 주차장 가장자리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온씨의 그런 제스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눈치 챘을 법한 빨간조끼 사내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모든 상황을 종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곤란해..”
그렇다. 그 와중에 여행객인지 등산객인지 모를 사람들이 벌써 운두령 주차장에 모여들어있었고, 그들도 만약 계방산 방향이든 불발령 방향이든 운두령에서 시작하는 등산로로 접어들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온씨와 정병호님 둘에게만 특혜를 배풀기가 상당히 난처했을 것이다.
그들은 빨간조끼의 사내를 설득하는 것이 더 이상 의미없다고 판단했다. 두 사람은 운두령 정상 주차장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남은 방법은 하나, 고분고분 빨간 조끼의 사내에게 작별을 고하고 도로로 내려가는 척 하다가 사내의 시야를 벗어나는 지점에서 도로를 버리고 계곡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능선으로 치고 올라가 원래 가고자 했던 능선길과 합류하는 것이다. 합류하는 지점은 운두령 정상 주차장으로부터 빨간조끼의 눈에 띠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떨어진 지점이어야 한다. 당연히 길은 없다. 그러나 다행히 아직 이 고산지대에는 이제 새싹이 갓 돋아나올 정도여서 길이 없다고는 하나 자전거 한대 끌고 진행하는데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을 듯 했다. 문제는 경사였다. 브이자로 깊이 파인 협곡의 시작 지점이라 거기를 가로질러 능선에 붙는 것이 결코 쉬어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어쩌랴!
이리하야 온씨와 정병호님은 얼마나 가파른 경사를 되짚어 올라가야 능선을 만나게 될지 불안에 떨면서 운두령을 굽이돌아 내려오는 31번 국도를 벗어나 원시림으로 뒤덮힌 웅장한 협곡 속으로 빨려들어감으로써 대망의 운두령-불발령 능선 40리 탐험을 시작한다.
땅바닥에서는 겨우내 말라 버석거리는 낙엽과 잡초 더미를 뚫고 젖먹이 아기의 손아귀 마냥 오동통한 이름모를 들풀의 잎사귀들이 속속 삐져 올라오고, 그 위로는 아름 드리 나무들이 초봄의 물기를 잔뜩 머금은 채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내며 솟아있다. 앙상한 가지는 금방이라도 초록 이파리를 터트리려는 듯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 태고의 풍경 속으로 두 불청객이 지금 자전거란 문명의 흉기를 들고 침입한 것이다. 온씨는 길 없는 가파른 비탈을 바퀴가 구르는대로 이끌려 흘러내려갔다. 그 뒤로는 날카로운 문명의 흉기가 대지를 파고들어 긴 상처를 남기고, 이 거대한 숲속에 깃든 태고의 평화는 깨진다.
내리막이 끝나고 두 사람은 드디어 브이자 협곡의 밑바닥에 닿았다. 고개를 들고 성벽처럼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는 가파른 비탈을 올려다 본 온씨는 순간 온몸이 전율에 휩싸인다. 그것은 그 비탈의 살인적인 경사 때문도 아니고 나무들 사이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비탈의 길이 때문도 아니었다. 꽃이었다. 그 비탈은 마치 보석을 박아 놓은 것처럼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곳에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갖가지 야생화들을 지천으로 피워놓고 있었다. 나무 그늘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초봄의 따스한 햇살은 형형색색의 꽃 잎사귀 위에서 찬란하게 반사되어 그 깊고 깊은 협곡의 심연을 처연할 정도로 밝혀주었다. 온씨는 저 야생의 화원을 짓밟고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이 도저히 용납되지가 않았다. 코끝이 땅바닥에 닿을 듯이 가파른 경사 위에 첫 발자욱을 올려놓으면서 온씨는 결코 이 꽃들을 단 하나도 밟지 않겠노라 맹세했다. 물론 이 굳은 맹세는 오름길의 고통이 커지면서 서서히 약해지게 되지만, 온씨는 팔다리와 자전거를 제어할 기운이 남아있는 한 무슨 부비트랩인 냥 꽃들을 피해 다녔다.
이 꽃들의 향연은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능선에 올라서서 보래령 사거리 까지 가는 장장 두시간 반 동안 끝날 줄을 몰랐다. 그 이후로는 고산 지대의 능선에서 흔히 보이는 산죽과 진달래,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억센 가지의 잡목들이 뒤엉켜 등장하면서 서서히 꽃들은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러나 단언컨대, 보래령 사거리 이후에 다섯시간이 넘는 사투에서 온씨를 살아 버틸 수 있게 해 준 것은 전적으로 그 꽃들의 빛깔과 자태였을 것이다.
다행히 비탈은 그 가파른 경사와 기나긴 길이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도전 정신으로 충만한 두 사람에게 그다지 큰 장애물이 아니었다. 쉽사리 지능선에 올라붙는 데 성공한 두 사람은 지능선 상에 길이 분명하게 나 있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주능선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구절 양장의 고불탕 길을 가끔씩 가로막고 쓰러져 있는 크고 작은 나무들을 넘고 또 넘으면서 10여분을 꾸역꾸역 걸어 오르자, 드디어 사방이 탁 트이면서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주능선 마루가 눈에 들어왔다. 벌써부터 땀범벅이 된 온씨에게는 저 산불감시초소에서 또 제 2의 빨간 조끼가 나타나지 않을 까 하는 절망적인 공포가 엄습해 왔다. 애써 공포를 잊으려는 듯 고개를 떨구고 땅만 보고 걷다가 온씨가 눈을 들어 다시 능선을 쳐다보았을 때는 정병호님이 벌써 먼저 능선 마루금에 올라 자전거를 자빠트리고 감시초소를 느긋하게 올려다 보고 있었다.
오 천지신명이시여 감시초소는 비어 있습니다!
오전 아홉시 삼십분. 두 사람은 빨간조끼의 사내가 점령한 운두령 등산로 입구를 우회하는 데 40여분을 쏟아 부은 후에야 비로소 불발령을 향해 내리달리는 주능선 위로 드디어 복귀할 수 있었다.
능선은 담채화처럼 아름다웠다. 초록 물이 오르기 시작한 대지에는 아까 비탈에서 보았던 것 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도도해질 대로 도도해진 야생화들이 저마다 무리 속에서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돋보이게 하려고 앞다투어 피어있고, 그 사이로 자전거 하나 사람 하나 나란히 걸을 만 한 너비의 길이 단아하게 펼쳐졌다. 나무 한그루 한그루를 보면 아직도 겨울의 먹회색을 벗지 못하고 있지만, 그 나무들이 모인 숲을 보면 스프레이를 뿌린 듯 연록의 기운이 완연하다. 세잔이 울고 갈 한폭의 수채화...
온씨와 정병호님은 이 담백한 풍경이 주는 안위를 온 몸으로 받으면서 별로 힘드는 줄 모르게 봉우리A에 올라섰다. 그러나 온씨는 거기가 봉우리 B인줄로만 알았다. 주변 지형을 봐도 그렇고, 용써서 올라온 시간을 고려해 보아도 거기는 봉우리 B여야만 했다... 그러나 정병호님의 찬찬한 설명을 듣고 주위를 다시 살펴보니 봉우리 A가 확실했다. 이 자그마한 착각이 온씨에게는 적잖은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개척질에서 중요한 것은 실재 거리가 아니라 ‘심리적 거리’다.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지도 상의 여러 봉우리들을 성큼 성큼 지나쳐 온 것을 알고 짐짓 놀라게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꽤 멀리 온 것 같은데 지도 상의 1센티미터를 채 벗어나지 못한 것을 알고 몸서리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봉우리 A와 B를 혼동한 자그마한 착각은 온씨에게 오늘의 개척질이 후자의 전형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 불안은 적중하고야 만다...
봉우리A를 총총 벗어난 온씨는 그럭저럭 크게 용쓰지 않고 무난히 봉우리B에 올라서는 데 성공한다. 해발 1273미터....정상부가 워낙 넓은 탓에 산 아래의 풍광이 조망되지 않아 그 높이를 실감하지 못한다. 자, 지도를 잘 보자. 여기서부터는 마치 자로 잰 듯 능선이 거의 일직선을 이루며 달리기 시작한다. 그 능선상의 많은 봉우리들도 당연히 한줄로 가지런히 늘어서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것을 온씨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된다. 한 일자 능선은 앞으로 가야할 봉우리가 몇 개 남았나를 전혀 가늠할 수 없게 만든다. 그저 눈 앞에 솟아있는 봉우리만 보고 가는 것이다. 체력이 떨어져 갈수록 눈 앞에 보이는 저 봉우리가 끝이기를 비는 마음은 더 간절해지지만, 그 봉우리에 올라보면 또다른 봉우리가 코 앞에 솟구쳐 있다. 그 봉우리에 올라서면 또다른 봉우리.... 끝이 없다. 염원과 절망을 수없이 반복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이 반복이 언제 끝날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한일자 능선의 저주다.
한일자 능선에서 앞으로 갈 길이 얼만큼 남았는지를 가늠하는 것은 사치다... 마침내 이 진리를 터득한 두 사람은 봉우리가 나오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영겁과 같은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끌다 타다를 얼마나 되풀이 했을까.... 마침내 삼각점이 박히고 주변이 탁 트인 헬기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1381봉(봉우리D).
시계는 오전 11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주능선에 붙은 지 두 시간 만이다. 지도에 따르면 이제 보래령 안부까지 상당히 긴 거리의 내리막이 우리를 반겨줄 것이다. 기대에 찬 두 사람은 자전거를 자빠트리고 샛노랗게 핀 민들레 옆에서 꿀같은 휴식을 취한다. 산행 도중 도무지 물을 먹지 않아서 번번이 사람을 놀래키곤 했던 정병호님이 물병을 꺼내들더니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한다.
봉우리D를 벗어나는 하산로는 온씨의 동물적 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동안의 오르막길에서 겪었던 고통스런 노역을 한 달음에 보상받으려는 듯 온씨는 브레이크를 풀고 페달을 굴렀다. 온씨의 자전거는 주인의 뜻을 십분 헤아린 듯 빠른 속도로 내리막길 아래로 빨려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자 흙길의 마지막을 알리는 듯 돌부리 하나가 솟구쳐 있는 것이 보이더니 그 아래로는 한결 더 가팔라진 경사에 이리저리 바위들이 삐죽삐죽 얼굴을 드리밀고 있었다. 옳타꾸나! 온씨는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있게 앞바퀴를 첫 바위위로 들이밀었는데... 불과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온씨는 영문도 모르는 채 자전거와 함께 공중제비를 돌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팔꿈치로 착지를 하려하다 왠지 허전함을 느끼는 온씨! 자신의 팔꿈치가 누드인 것을 그제야 알아차린다. 그 순간 팔꿈치에 둘려져 있어야 할 폭스표 보호대는 육육일표 무릎 보호대와 함께 온씨의 등짝 위 배낭 속에 고히 모셔져 있었던 것이다. 바위 투성이 급경사 위에 도저히 맨팔꿈치를 처박을 엄두가 안 난 온씨는 한 박자 머뭇거리며 팔꿈치 대신 손바닥을 돌부리로 치장된 지면을 향해 내리 벋었다. 그 한 박자의 머뭇거림 때문이었을까... 둔탁한 소음과 더불어 날카로운 바위 투성이 위에 경착륙한 온씨에게 오른 손 엄지손가락으로부터 섬광과 같은 통증이 전해진다.
“꺼흑!”
외마디 비명과 함께 거친 바위 구간을 지나 한참을 굴러떨어지던 온씨의 육신은 어른 허벅지 만한 나무 밑둥에 이르러서야 겨우 멈춰섰다. 엄지 손가락에서 전해지는 날카로운 통증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릴 적 광목 솜이불 위에 드러누워서 느끼던 안락한 쾌감이 널부러진 팔다리를 타고 온씨의 심장으로 밀려들었다. 땅바닥을 통해 공명되어 전해지는 자신의 심장 박동소리를 느끼며 온씨는 불현듯 자신과 대지가 하나임을 깨닫는다.
전문용어로는 “신토불이”되겠다.
다행히 부상은 그리 크지 않아 통증은 참을 만 했고, 핸들을 쥐고 자전거를 제어하기도 그다지 불편함이 없었다. 통과의례를 호되게 치른 온씨는 이제 바야흐로 보래령으로 내려가는 기나긴 내리막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즐거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내리막길의 쾌락을 탐닉하던 온씨의 눈에 드디어 보래령 안부가 보이기 시작한다. 내리막이 끝나는 지점에는 흔한 표지판 하나 없이 사방 자전거 휠베이스 만한 크기의 빈 공간이 있고 언제 내리막이 있었냐는 듯 숨돌릴 틈도 없이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보래령이 어딘지를 물어보는 초보(?) 약초꾼들 한 무리를 만나 당신들이 선 거기가 보래령이라고 일러주는 것으로 짧은 휴식을 마무리지은 두 사람은 다시 보래봉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몸뚱아리를 버팀목 삼아 자전거를 밀어올리기를 어언 한 시간.... 영겁과 같은 삼보일배 아니, 삼보일휴(三步一休)의 고행을 마친 후 두 사람은 보래봉을 점령한다. 한일자 능선의 저주는 갈수록 깊어진다. 보래봉에서 봉우리E로 가는 길 역시 지도 위에는 평탄한 능선으로 보이나, 실은 수 없이 많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마의 구간이다. ‘눈앞의 봉우리만 일단 넘어서고 보자’는 각오를 속으로 주문처럼 되뇌이면서 오르고 내리기를 수십번.... 들이대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두 사람은 드디어 회령봉으로 갈라지는 봉우리E에 올라서고 다시 자운치로 내려가는 긴 내리막이 주는 보상에 잠시나마 고통을 잊는다. 역시나 온씨는 이 짧은 보상을 최대한 만끽하려고 반 실성하여 내리지르다가... 아차차차 자운치 안부에서 능선을 벗어나 유동으로 내려가는 하산로로 치달리는 멍청하고 참담한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자운치 갈림길에서 보면 능선으로 진행하는 길은 좁고 흐릿하고 한쪽으로 비껴나 있는 반면 유동쪽 하산로는 넓고 당당하고 분명하다. 내리막이 여기서 끝나선 안된다는 절망적인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온씨는 아무 고민 없이 유동쪽 하산로로 핸들을 꺾었던 것이다.
지나친 탐닉은 화를 부른다는 만고의 진리를 고통스럽게 곱씹으면서 온씨는 불과 수초 전에 괴성을 지르며 내리달리던 길을 다시 기어 올라왔다. 자운치 안부에서 숨을 돌린 온씨는 정병호님을 앞세우고 더 희미해지고 잡목과 덤풀의 간섭이 더 심해진 주능선로를 따라 다시 고행의 길을 시작한다. 시지푸스가 생각난다. 이 보상 없는 고통은 과연 언제 끝날 것인가...
자운치에서 봉우리F를 지나 “원한의 1118봉”에 이르는 구간은 이번 능선길 탐험에서 일자능선의 저주가 극에 달했던 구간이다. 지도상으론 완만한 오름 구간인 듯 보이지만, 그것은 지형의 대세가 그렇다는 것이고, 등고선 사이사이에 무수히 많은 새끼 봉우리들이 생략되어 있음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일자능선의 저주는 눈앞에 있는 새끼 봉우리가 1118봉일 것이라는 착각을 수도 없이 반복하게 만든다. 더구나 등산로에는 우악스러운 잡목들이 거의 점령하다시피 들어차 핸들바와 페달을 끊임없이 붙잡고 늘어진다. 나중에는 땅바닥에 엎드려 산을 향해 애걸하게 된다.
“제발 저 봉우리가 1118봉이게 해주세요...제발... 무슨 짓이라도 하겠습니다...예?”
이런 애절한 원망에도 아랑곳 않고 고통의 오르내림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무자비하게 반복되었고, 온씨의 눈동자와 온 사지가 결국 절망과 체념으로 흐물흐물해져 녹아내리려고 할 즈음에 가서야 비로소 앞서간 정병호님으로부터 그것이 마지막 봉우리라는 절규가 들려왔다. 온씨의 얼굴에 피식 냉소가 번져 나왔다. “왜, 벌써 끝내려구?” 웃는 입꼬리를 따라 걸쭉한 침이 흘러내리는 것을 온씨는 손으로 훔칠 수가 없었다.
1118봉은 그날 운두-불발 능선40리 탐험이 안겨다 준 고통의 클라이막스였다. 이 클라이막스를 넘어서자 억세던 진달래와 잡목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그나마 헤쳐가기 편한 산죽(조릿대) 밭이 길 좌우로 펼쳐진다. 잠시 내리막이 있은 후 봉우리G로 가는 갈림길을 향해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지만 이제 한일자 능선의 저주는 고비를 넘겼다. 비교적 만만하게 홍정산으로 이어지는 갈림길 위에 올라선 온씨 일행은 40리 능선길의 마지막 내리막을 내달릴 채비를 갖춘다. 마지막 남은 물을 모두 비우고, 초코바를 씹은 두 사람은 홍정산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불발령 임도를 향해 산죽밭을 가로지른다.
“쏴아아아아아..”
굽이굽이 꼬불거리는 하산로를 따라 내려가며 산죽이 자전거에 부딛쳐 내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온씨는 자전거를 타고 검푸른 바다 위를 유영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용왕에게 간을 뺏길 뻔 한 절대절명의 위기를 넘기고 거북이 등짝에 올라타 용궁을 도망쳐 나오는 토끼의 심정이 이러하였을까... 온씨는 자전거가 구르는대로 몸을 내맡기고 산죽밭이 선사하는 자유와 안도를 만끽한다.
드디어 오후5시 35분, 온씨와 정병호님은 능선 40리 고난과 환희의 장정을 마무리하고 불발령 임도 위로 내려선다. 빨간조끼의 사내 덕분에 추가된 40분 동안의 고행을 포함하여 장장 8시간에 걸친 장정이 모두 끝났다. 무사 생환을 자축한 두 사람은 다시 임도를 내리달리고 한적한 농로를 지나 한달음에 도장골을 지나쳐 자운리 국도변에 도착한다. 저녁 6시가 넘어서고 있었고, 드디어 비가오기 시작했다. 이 비가 한 시간쯤 일찍 시작되었더라면 두 사람은 아마 능선 위에서 생불이 되었을 것이다. 천지신명의 도우심에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린 두 사람은 지나는 차를 두 번에 걸쳐 얻어타고 운두령 주차장으로 돌아왔고, 빨간조끼의 사내가 퇴근하고 없음을 아쉬워하면서 차에 자전거를 싣고 이미 완전히 어두워진 운두령을 내리달려 불켜진 첫 식당에 들어가 괴기와 밥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온씨는 정병호님과 헤어지면서 손까락을 걸고 약속한다.
“이제 우리 한 방에 올라가서 한 방에 내려오는 걸루다 댕깁시다. 능선은 너무 힘들어요...”
“그러자구요. 우리도 인자 나이생각 혀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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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 삼십분...온씨는 알람소리를 온 몸으로 들으면서 잠자리에서 튕겨나왔다. 겨우 세시간 남짓 눈을 붙이고 일어난 터라 자꾸만 이불위로 엎어지려는 몸뚱아리를 가까스로 일으켜 세우는 온씨. 그러나 떠지지 않는 눈을 부비면서 베란다 문을 열고 전날 챙겨두었던 장비가방과 자전거를 끌어내는 동안 온씨의 몸뚱이는 일년 남짓 만에 처음 떠나는 개척질의 흥분에 압도되어 신기할 정도로 빨리 제 컨디션을 회복하고 있었다.
온씨가 집을 나선 것은 새벽 네시 오분... 아직 깨어나지 않은 도심을 묘한 흥분 속에 가로질러 온씨는 어느덧 영동 고속도로로 접어든다. 두시간이 채 못되어 정병호님과 만나기로 한 횡성 휴게소에 도착했다. 여섯 시를 갓 넘긴 이른 아침 횡성 휴게소는 약간 황량하기까지 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염려했던 비는커녕 햇빛이 내리쬘 기세다. 전날 비올거라며 약을 올린 바모씨와 토모씨에게 그 신새벽에 당장 전화를 걸어 이 비보를 알려주고 싶음 마음을 온씨는 겨우 겨우 억누른다. 차 속에서 늦봄의 따스한 아침 양기를 온몸에 받다보니 졸음이 쏟아졌다. 한시간을 달게 잤다. 이로써 온씨의 몸은 완벽하게 모든 피로를 씻고 최상의 컨디션을 회복했다.
일곱시가 넘어서자 정병호님이 새 애마를 타고 휴게소에 나타난다. 반갑다. 온씨는 정병호님이 새 자전거를 타고있는 것을 그날 처음 보았다. 산악자전거꾼들에겐 너나 없이 정도는 다르지만 자전거라는 기계를 구성하는 쇳덩어리들의 품질과 외관, 제조사의 명성 등등에 대한 욕심이 있기 마련인데, 이 별만 보고 사는 노청년은 도무지 그런데 관심이 없어 보다 못한 주변 자전거꾼들이 하나씩 부품과 프레임을 갹출(?)하여 번듯한(!) 자전거를 한 대 조립해 주었던 것인데, 온씨는 정병호님이 그 애틋한 사연의 자전거를 가지고 나온 것을 그날 처음 본 것이다. 그의 스타일을 너무나 잘 알고있는 온씨는 럭셔리 뉴 머신 옆에서 어색하게 웃고있는 그가 한없이 해맑아 보였다. 그리고 다운힐 자전거에만 집착하느라 정작 그의 새 자전거에 부품 하나 보태지 못했던 자신이 약간은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여간, 정병호님의 새 자전거는 전혀 그의 스타일과는 어울리지 않게 가볍고, 럭셔리하고, 쭉쭉 잘 나갔고, 그의 스타일과 너무 잘 어울리게 청소상태는 심히 불량스러웠다.
“밥뭅시다.”
두 사람은 조미료 성분이 재료의 반은 족히 넘을 것 같은 순두부백반과 황태해장국을 잽싸게 먹어치운 다음 서둘러 산행 출발점인 운두령을 향해 차를 몰았다. 산불감시원이 출근하기 전에 장비를 꾸려 능선에 들어서야만 한다. 5월1일부로 국립공원 입산금지가 해제되었다고는 하나, 혹시 모르지 않는가..... 그러나 이 기우는 곧 현실이 되어 두 사람의 발목을 잡았고, 결국 30여분을 길 없는 협곡으로 우회하는 고통을 두 사람에게 안겨주게 된다.
운두령 정상에 도착한 것은 8시30분. 바람이 셌고 인부 서너명이 목조 전망대를 만드는 공사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홉시 전에 도착했다고 안도하면서 차에서 내려 자전거를 끌어내리려는 순간, 산불방지라고 쓴 빨간 조끼를 입은 50대 중반쯤의 사내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맞은편 계방산 등산로 초입에 붙어있는 플레카드로 눈길을 돌렸다. 아뿔사!
“산불방지! 5월 15일까지 입산금지”
온씨는 저 빨간조끼의 사내를 따돌리지 않고는 일년을 기다린 숙원의 능선 개척질을 꼼짝없이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음을 알아차린다. 안경 너머로 날카롭게 그들을 응시해오던 빨간 조끼의 사내는 그들이 차에서 엉뚱하게도 자전거를 꺼내자 짐짓 경계의 빛을 누구러뜨리고 묻는다.
“아이구 자전거 타실려구?”
정병호님이 자포자기한 듯 대답한다.
“예.”
“엊그제도 여기서 한분 자전거 타고 가시든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그럼 그들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이 능선을 자전거로 갔단 말인가? 그럼 자전거 타고는 입산금지를 어겨도 된다는 말인가? 온씨는 한줄기 희망의 빛이 비쳐지는가 하여 빨간조끼 사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말인즉 누군가 서울서 혼자 도로로 자전거를 타고 와서는 속초로 가는 중이라며 이 운두령 고개를 넘어갔단 말이었다. 그럼 그렇지... 이 빨간 조끼의 사내는 우리가 등산객인 줄 알고 딱 걸렸다 싶어 다가왔다가 자전거를 꺼내는 걸 보고 도로로 자전거탈 요량으로 온 줄 착각한 모양이다.
빨간 조끼의 산불감시원은 두 사람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풀고 자전거가 얼마냐, 어디서 왔냐, 등등을 물어댔다. 초조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건성건성 대답하면서 자전거 탈 준비를 마친 다음, 드디어 온씨와 정병호님은 고민에 빠진다. 작전회의에 들어갔다. 일단은 들이대보는 걸로 의견을 모으고 빨간조끼의 사내에게 다가간다.
“저... 실은 저희들이 ...”
이제 막 분주히 문 열 채비를 하고 있는 노점 천막 뒤로 분명히 분명히 보이는 등산로를 가리키며 정병호님이 말을 이었다.
“... 사실은 저리 갈 거거든요...”
빨간조끼의 사내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저길 자전거로 간단 말이냐, 어디까지 갈거냐, 등을 물어대다가 이내 자신의 본연의 임무를 깨닫고는 단호한 표정과 말투로 되돌아와서 잘라 말했다.
“안돼요.”
그들은 담배를 안피우기 때문에 화기를 소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면서 선처를 부탁했으나 빨간조끼의 사내는 막무가내였다.
"목사님이 와도 안돼요"
온씨는 여차하믄 담뱃값 정도는 슬쩍 찔러줄 각오를 하고 이번 한번만 눈감아 달라고 애원하면서 빨간조끼의 사내를 주차장 가장자리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온씨의 그런 제스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눈치 챘을 법한 빨간조끼 사내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모든 상황을 종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곤란해..”
그렇다. 그 와중에 여행객인지 등산객인지 모를 사람들이 벌써 운두령 주차장에 모여들어있었고, 그들도 만약 계방산 방향이든 불발령 방향이든 운두령에서 시작하는 등산로로 접어들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온씨와 정병호님 둘에게만 특혜를 배풀기가 상당히 난처했을 것이다.
그들은 빨간조끼의 사내를 설득하는 것이 더 이상 의미없다고 판단했다. 두 사람은 운두령 정상 주차장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남은 방법은 하나, 고분고분 빨간 조끼의 사내에게 작별을 고하고 도로로 내려가는 척 하다가 사내의 시야를 벗어나는 지점에서 도로를 버리고 계곡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능선으로 치고 올라가 원래 가고자 했던 능선길과 합류하는 것이다. 합류하는 지점은 운두령 정상 주차장으로부터 빨간조끼의 눈에 띠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떨어진 지점이어야 한다. 당연히 길은 없다. 그러나 다행히 아직 이 고산지대에는 이제 새싹이 갓 돋아나올 정도여서 길이 없다고는 하나 자전거 한대 끌고 진행하는데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을 듯 했다. 문제는 경사였다. 브이자로 깊이 파인 협곡의 시작 지점이라 거기를 가로질러 능선에 붙는 것이 결코 쉬어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어쩌랴!
이리하야 온씨와 정병호님은 얼마나 가파른 경사를 되짚어 올라가야 능선을 만나게 될지 불안에 떨면서 운두령을 굽이돌아 내려오는 31번 국도를 벗어나 원시림으로 뒤덮힌 웅장한 협곡 속으로 빨려들어감으로써 대망의 운두령-불발령 능선 40리 탐험을 시작한다.
땅바닥에서는 겨우내 말라 버석거리는 낙엽과 잡초 더미를 뚫고 젖먹이 아기의 손아귀 마냥 오동통한 이름모를 들풀의 잎사귀들이 속속 삐져 올라오고, 그 위로는 아름 드리 나무들이 초봄의 물기를 잔뜩 머금은 채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내며 솟아있다. 앙상한 가지는 금방이라도 초록 이파리를 터트리려는 듯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 태고의 풍경 속으로 두 불청객이 지금 자전거란 문명의 흉기를 들고 침입한 것이다. 온씨는 길 없는 가파른 비탈을 바퀴가 구르는대로 이끌려 흘러내려갔다. 그 뒤로는 날카로운 문명의 흉기가 대지를 파고들어 긴 상처를 남기고, 이 거대한 숲속에 깃든 태고의 평화는 깨진다.
내리막이 끝나고 두 사람은 드디어 브이자 협곡의 밑바닥에 닿았다. 고개를 들고 성벽처럼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는 가파른 비탈을 올려다 본 온씨는 순간 온몸이 전율에 휩싸인다. 그것은 그 비탈의 살인적인 경사 때문도 아니고 나무들 사이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비탈의 길이 때문도 아니었다. 꽃이었다. 그 비탈은 마치 보석을 박아 놓은 것처럼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곳에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갖가지 야생화들을 지천으로 피워놓고 있었다. 나무 그늘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초봄의 따스한 햇살은 형형색색의 꽃 잎사귀 위에서 찬란하게 반사되어 그 깊고 깊은 협곡의 심연을 처연할 정도로 밝혀주었다. 온씨는 저 야생의 화원을 짓밟고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이 도저히 용납되지가 않았다. 코끝이 땅바닥에 닿을 듯이 가파른 경사 위에 첫 발자욱을 올려놓으면서 온씨는 결코 이 꽃들을 단 하나도 밟지 않겠노라 맹세했다. 물론 이 굳은 맹세는 오름길의 고통이 커지면서 서서히 약해지게 되지만, 온씨는 팔다리와 자전거를 제어할 기운이 남아있는 한 무슨 부비트랩인 냥 꽃들을 피해 다녔다.
이 꽃들의 향연은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능선에 올라서서 보래령 사거리 까지 가는 장장 두시간 반 동안 끝날 줄을 몰랐다. 그 이후로는 고산 지대의 능선에서 흔히 보이는 산죽과 진달래,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억센 가지의 잡목들이 뒤엉켜 등장하면서 서서히 꽃들은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러나 단언컨대, 보래령 사거리 이후에 다섯시간이 넘는 사투에서 온씨를 살아 버틸 수 있게 해 준 것은 전적으로 그 꽃들의 빛깔과 자태였을 것이다.
다행히 비탈은 그 가파른 경사와 기나긴 길이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도전 정신으로 충만한 두 사람에게 그다지 큰 장애물이 아니었다. 쉽사리 지능선에 올라붙는 데 성공한 두 사람은 지능선 상에 길이 분명하게 나 있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주능선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구절 양장의 고불탕 길을 가끔씩 가로막고 쓰러져 있는 크고 작은 나무들을 넘고 또 넘으면서 10여분을 꾸역꾸역 걸어 오르자, 드디어 사방이 탁 트이면서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주능선 마루가 눈에 들어왔다. 벌써부터 땀범벅이 된 온씨에게는 저 산불감시초소에서 또 제 2의 빨간 조끼가 나타나지 않을 까 하는 절망적인 공포가 엄습해 왔다. 애써 공포를 잊으려는 듯 고개를 떨구고 땅만 보고 걷다가 온씨가 눈을 들어 다시 능선을 쳐다보았을 때는 정병호님이 벌써 먼저 능선 마루금에 올라 자전거를 자빠트리고 감시초소를 느긋하게 올려다 보고 있었다.
오 천지신명이시여 감시초소는 비어 있습니다!
오전 아홉시 삼십분. 두 사람은 빨간조끼의 사내가 점령한 운두령 등산로 입구를 우회하는 데 40여분을 쏟아 부은 후에야 비로소 불발령을 향해 내리달리는 주능선 위로 드디어 복귀할 수 있었다.
능선은 담채화처럼 아름다웠다. 초록 물이 오르기 시작한 대지에는 아까 비탈에서 보았던 것 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도도해질 대로 도도해진 야생화들이 저마다 무리 속에서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돋보이게 하려고 앞다투어 피어있고, 그 사이로 자전거 하나 사람 하나 나란히 걸을 만 한 너비의 길이 단아하게 펼쳐졌다. 나무 한그루 한그루를 보면 아직도 겨울의 먹회색을 벗지 못하고 있지만, 그 나무들이 모인 숲을 보면 스프레이를 뿌린 듯 연록의 기운이 완연하다. 세잔이 울고 갈 한폭의 수채화...
온씨와 정병호님은 이 담백한 풍경이 주는 안위를 온 몸으로 받으면서 별로 힘드는 줄 모르게 봉우리A에 올라섰다. 그러나 온씨는 거기가 봉우리 B인줄로만 알았다. 주변 지형을 봐도 그렇고, 용써서 올라온 시간을 고려해 보아도 거기는 봉우리 B여야만 했다... 그러나 정병호님의 찬찬한 설명을 듣고 주위를 다시 살펴보니 봉우리 A가 확실했다. 이 자그마한 착각이 온씨에게는 적잖은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개척질에서 중요한 것은 실재 거리가 아니라 ‘심리적 거리’다.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지도 상의 여러 봉우리들을 성큼 성큼 지나쳐 온 것을 알고 짐짓 놀라게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꽤 멀리 온 것 같은데 지도 상의 1센티미터를 채 벗어나지 못한 것을 알고 몸서리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봉우리 A와 B를 혼동한 자그마한 착각은 온씨에게 오늘의 개척질이 후자의 전형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 불안은 적중하고야 만다...
봉우리A를 총총 벗어난 온씨는 그럭저럭 크게 용쓰지 않고 무난히 봉우리B에 올라서는 데 성공한다. 해발 1273미터....정상부가 워낙 넓은 탓에 산 아래의 풍광이 조망되지 않아 그 높이를 실감하지 못한다. 자, 지도를 잘 보자. 여기서부터는 마치 자로 잰 듯 능선이 거의 일직선을 이루며 달리기 시작한다. 그 능선상의 많은 봉우리들도 당연히 한줄로 가지런히 늘어서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것을 온씨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된다. 한 일자 능선은 앞으로 가야할 봉우리가 몇 개 남았나를 전혀 가늠할 수 없게 만든다. 그저 눈 앞에 솟아있는 봉우리만 보고 가는 것이다. 체력이 떨어져 갈수록 눈 앞에 보이는 저 봉우리가 끝이기를 비는 마음은 더 간절해지지만, 그 봉우리에 올라보면 또다른 봉우리가 코 앞에 솟구쳐 있다. 그 봉우리에 올라서면 또다른 봉우리.... 끝이 없다. 염원과 절망을 수없이 반복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이 반복이 언제 끝날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한일자 능선의 저주다.
한일자 능선에서 앞으로 갈 길이 얼만큼 남았는지를 가늠하는 것은 사치다... 마침내 이 진리를 터득한 두 사람은 봉우리가 나오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영겁과 같은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끌다 타다를 얼마나 되풀이 했을까.... 마침내 삼각점이 박히고 주변이 탁 트인 헬기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1381봉(봉우리D).
시계는 오전 11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주능선에 붙은 지 두 시간 만이다. 지도에 따르면 이제 보래령 안부까지 상당히 긴 거리의 내리막이 우리를 반겨줄 것이다. 기대에 찬 두 사람은 자전거를 자빠트리고 샛노랗게 핀 민들레 옆에서 꿀같은 휴식을 취한다. 산행 도중 도무지 물을 먹지 않아서 번번이 사람을 놀래키곤 했던 정병호님이 물병을 꺼내들더니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한다.
봉우리D를 벗어나는 하산로는 온씨의 동물적 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동안의 오르막길에서 겪었던 고통스런 노역을 한 달음에 보상받으려는 듯 온씨는 브레이크를 풀고 페달을 굴렀다. 온씨의 자전거는 주인의 뜻을 십분 헤아린 듯 빠른 속도로 내리막길 아래로 빨려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자 흙길의 마지막을 알리는 듯 돌부리 하나가 솟구쳐 있는 것이 보이더니 그 아래로는 한결 더 가팔라진 경사에 이리저리 바위들이 삐죽삐죽 얼굴을 드리밀고 있었다. 옳타꾸나! 온씨는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있게 앞바퀴를 첫 바위위로 들이밀었는데... 불과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온씨는 영문도 모르는 채 자전거와 함께 공중제비를 돌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팔꿈치로 착지를 하려하다 왠지 허전함을 느끼는 온씨! 자신의 팔꿈치가 누드인 것을 그제야 알아차린다. 그 순간 팔꿈치에 둘려져 있어야 할 폭스표 보호대는 육육일표 무릎 보호대와 함께 온씨의 등짝 위 배낭 속에 고히 모셔져 있었던 것이다. 바위 투성이 급경사 위에 도저히 맨팔꿈치를 처박을 엄두가 안 난 온씨는 한 박자 머뭇거리며 팔꿈치 대신 손바닥을 돌부리로 치장된 지면을 향해 내리 벋었다. 그 한 박자의 머뭇거림 때문이었을까... 둔탁한 소음과 더불어 날카로운 바위 투성이 위에 경착륙한 온씨에게 오른 손 엄지손가락으로부터 섬광과 같은 통증이 전해진다.
“꺼흑!”
외마디 비명과 함께 거친 바위 구간을 지나 한참을 굴러떨어지던 온씨의 육신은 어른 허벅지 만한 나무 밑둥에 이르러서야 겨우 멈춰섰다. 엄지 손가락에서 전해지는 날카로운 통증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릴 적 광목 솜이불 위에 드러누워서 느끼던 안락한 쾌감이 널부러진 팔다리를 타고 온씨의 심장으로 밀려들었다. 땅바닥을 통해 공명되어 전해지는 자신의 심장 박동소리를 느끼며 온씨는 불현듯 자신과 대지가 하나임을 깨닫는다.
전문용어로는 “신토불이”되겠다.
다행히 부상은 그리 크지 않아 통증은 참을 만 했고, 핸들을 쥐고 자전거를 제어하기도 그다지 불편함이 없었다. 통과의례를 호되게 치른 온씨는 이제 바야흐로 보래령으로 내려가는 기나긴 내리막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즐거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내리막길의 쾌락을 탐닉하던 온씨의 눈에 드디어 보래령 안부가 보이기 시작한다. 내리막이 끝나는 지점에는 흔한 표지판 하나 없이 사방 자전거 휠베이스 만한 크기의 빈 공간이 있고 언제 내리막이 있었냐는 듯 숨돌릴 틈도 없이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보래령이 어딘지를 물어보는 초보(?) 약초꾼들 한 무리를 만나 당신들이 선 거기가 보래령이라고 일러주는 것으로 짧은 휴식을 마무리지은 두 사람은 다시 보래봉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몸뚱아리를 버팀목 삼아 자전거를 밀어올리기를 어언 한 시간.... 영겁과 같은 삼보일배 아니, 삼보일휴(三步一休)의 고행을 마친 후 두 사람은 보래봉을 점령한다. 한일자 능선의 저주는 갈수록 깊어진다. 보래봉에서 봉우리E로 가는 길 역시 지도 위에는 평탄한 능선으로 보이나, 실은 수 없이 많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마의 구간이다. ‘눈앞의 봉우리만 일단 넘어서고 보자’는 각오를 속으로 주문처럼 되뇌이면서 오르고 내리기를 수십번.... 들이대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두 사람은 드디어 회령봉으로 갈라지는 봉우리E에 올라서고 다시 자운치로 내려가는 긴 내리막이 주는 보상에 잠시나마 고통을 잊는다. 역시나 온씨는 이 짧은 보상을 최대한 만끽하려고 반 실성하여 내리지르다가... 아차차차 자운치 안부에서 능선을 벗어나 유동으로 내려가는 하산로로 치달리는 멍청하고 참담한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자운치 갈림길에서 보면 능선으로 진행하는 길은 좁고 흐릿하고 한쪽으로 비껴나 있는 반면 유동쪽 하산로는 넓고 당당하고 분명하다. 내리막이 여기서 끝나선 안된다는 절망적인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온씨는 아무 고민 없이 유동쪽 하산로로 핸들을 꺾었던 것이다.
지나친 탐닉은 화를 부른다는 만고의 진리를 고통스럽게 곱씹으면서 온씨는 불과 수초 전에 괴성을 지르며 내리달리던 길을 다시 기어 올라왔다. 자운치 안부에서 숨을 돌린 온씨는 정병호님을 앞세우고 더 희미해지고 잡목과 덤풀의 간섭이 더 심해진 주능선로를 따라 다시 고행의 길을 시작한다. 시지푸스가 생각난다. 이 보상 없는 고통은 과연 언제 끝날 것인가...
자운치에서 봉우리F를 지나 “원한의 1118봉”에 이르는 구간은 이번 능선길 탐험에서 일자능선의 저주가 극에 달했던 구간이다. 지도상으론 완만한 오름 구간인 듯 보이지만, 그것은 지형의 대세가 그렇다는 것이고, 등고선 사이사이에 무수히 많은 새끼 봉우리들이 생략되어 있음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일자능선의 저주는 눈앞에 있는 새끼 봉우리가 1118봉일 것이라는 착각을 수도 없이 반복하게 만든다. 더구나 등산로에는 우악스러운 잡목들이 거의 점령하다시피 들어차 핸들바와 페달을 끊임없이 붙잡고 늘어진다. 나중에는 땅바닥에 엎드려 산을 향해 애걸하게 된다.
“제발 저 봉우리가 1118봉이게 해주세요...제발... 무슨 짓이라도 하겠습니다...예?”
이런 애절한 원망에도 아랑곳 않고 고통의 오르내림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무자비하게 반복되었고, 온씨의 눈동자와 온 사지가 결국 절망과 체념으로 흐물흐물해져 녹아내리려고 할 즈음에 가서야 비로소 앞서간 정병호님으로부터 그것이 마지막 봉우리라는 절규가 들려왔다. 온씨의 얼굴에 피식 냉소가 번져 나왔다. “왜, 벌써 끝내려구?” 웃는 입꼬리를 따라 걸쭉한 침이 흘러내리는 것을 온씨는 손으로 훔칠 수가 없었다.
1118봉은 그날 운두-불발 능선40리 탐험이 안겨다 준 고통의 클라이막스였다. 이 클라이막스를 넘어서자 억세던 진달래와 잡목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그나마 헤쳐가기 편한 산죽(조릿대) 밭이 길 좌우로 펼쳐진다. 잠시 내리막이 있은 후 봉우리G로 가는 갈림길을 향해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지만 이제 한일자 능선의 저주는 고비를 넘겼다. 비교적 만만하게 홍정산으로 이어지는 갈림길 위에 올라선 온씨 일행은 40리 능선길의 마지막 내리막을 내달릴 채비를 갖춘다. 마지막 남은 물을 모두 비우고, 초코바를 씹은 두 사람은 홍정산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불발령 임도를 향해 산죽밭을 가로지른다.
“쏴아아아아아..”
굽이굽이 꼬불거리는 하산로를 따라 내려가며 산죽이 자전거에 부딛쳐 내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온씨는 자전거를 타고 검푸른 바다 위를 유영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용왕에게 간을 뺏길 뻔 한 절대절명의 위기를 넘기고 거북이 등짝에 올라타 용궁을 도망쳐 나오는 토끼의 심정이 이러하였을까... 온씨는 자전거가 구르는대로 몸을 내맡기고 산죽밭이 선사하는 자유와 안도를 만끽한다.
드디어 오후5시 35분, 온씨와 정병호님은 능선 40리 고난과 환희의 장정을 마무리하고 불발령 임도 위로 내려선다. 빨간조끼의 사내 덕분에 추가된 40분 동안의 고행을 포함하여 장장 8시간에 걸친 장정이 모두 끝났다. 무사 생환을 자축한 두 사람은 다시 임도를 내리달리고 한적한 농로를 지나 한달음에 도장골을 지나쳐 자운리 국도변에 도착한다. 저녁 6시가 넘어서고 있었고, 드디어 비가오기 시작했다. 이 비가 한 시간쯤 일찍 시작되었더라면 두 사람은 아마 능선 위에서 생불이 되었을 것이다. 천지신명의 도우심에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린 두 사람은 지나는 차를 두 번에 걸쳐 얻어타고 운두령 주차장으로 돌아왔고, 빨간조끼의 사내가 퇴근하고 없음을 아쉬워하면서 차에 자전거를 싣고 이미 완전히 어두워진 운두령을 내리달려 불켜진 첫 식당에 들어가 괴기와 밥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온씨는 정병호님과 헤어지면서 손까락을 걸고 약속한다.
“이제 우리 한 방에 올라가서 한 방에 내려오는 걸루다 댕깁시다. 능선은 너무 힘들어요...”
“그러자구요. 우리도 인자 나이생각 혀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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