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바보 온달은 아마도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유명한 고구려인의 한 사람일 것이다.
‘삼국사기’ 온달전의 기록을 보면 가난하고 바보스러운 온달이 평강공주와 결혼한 후 무예를 닦아 매년 3월 3일에 열리는 수렵 행사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해 평원왕(재위 559∼590)의 눈길을 끌었고, 북주(北周)의 침입 때 큰 공을 세워 대형(大兄)이란 벼슬과 함께 정식으로 부마로 인정받았다.
그는 영양왕(재위 590∼618) 때 한강 유역의 땅을 회복하려고 출정했다가 아차성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이렇게 온달 이야기는 매우 설화적이다. 그러면 과연 온달은 설화의 주인공에 불과한가, 아니면 실존했던 인물인가.
●대외적 어려움의 시대에 탄생한 ‘온달’
당시 고구려가 처했던 국제정세를 보면 온달과 같은 행적을 보인 인물이 충분히 있음 직하다.
6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는 남북 양쪽에서 대외적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서북의 랴오둥(遼東) 쪽에서는 북제·북주 및 돌궐이 세력을 확장해 큰 위협이 되었으며,
남쪽으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가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는 랴오둥 지역에서 기존의 세력권을 유지하는 한편 신라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회복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영웅적인 행적을 남긴 인물이 역사상 실존했을 가능성은 높다.
아마도 당시 고구려의 대외전쟁에서 혁혁한 명성을 떨친 인물이 있었으며, 그러기에 신라와의 전투에서 발생한 그의 죽음은 더욱 안타깝게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리라.
그의 행적은 일종의 영웅담으로 윤색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하나의 설화로 전해지게 된 것은 아닐까. 아마도 그 인물의 이름이 ‘온달’이었을 것이다.
●온달은 평민인가 귀족인가
온달 설화가 더욱 관심을 끄는 이유는 가난하고 미천한 온달이 가장 존귀한 신분인 평강공주와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결혼하고 마침내 위대한 장군이 되었다는 이야기, 즉 비현실성에 있다.
근래 우리 사회에 ‘온달 콤플렉스’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이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란 말을 뒤집어서 소위 돈과 권력을 갖춘 집 딸과 결혼하려는 젊은 남성들의 결혼 세태를 풍자하는 말일 것이다. 과연 온달은 공주와의 결혼으로 출세한 인물인가.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지식에 비추어 보면 평민인 온달과 평강공주의 결혼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과연 역사적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신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온달이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면 그가 평원왕의 부마라는 사실도 허구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신분제를 고려할 때 공주와 결혼한 온달은 결코 가난한 평민 출신일 리 없다.
그렇다고 온달을 명문 귀족으로 보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온달 설화의 핵심은 온달과 평강공주의 지극히 비정상적인 결혼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온달이 평민 출신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가 평원왕의 부마가 되는 것이 세간에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출신이 낮았을 것이다. 아마도 왕실과의 통혼(通婚)권에서 벗어나 있던 하급 귀족 출신이 아닌가 한다.
당시 고구려의 신분제를 알기는 어렵지만, 대략 관등제를 보면 3, 4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온달설화에서 본래 평강공주와 결혼할 예정이었던 상부 고씨라는 인물은 최고 귀족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고구려 말기 연개소문 집안의 예처럼 대를 이어 최고 관직을 독점했다. 그 아래 중급 귀족이 있어 고구려 지배층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으며, 온달의 경우처럼 하급귀족 신분도 상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온달이 평강공주와 파격적인 결혼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이때도 자유연애는 있었을 터이니, 두 사람이 깊은 사랑에 빠져 신분의 격차를 뛰어넘었을 것이라는 낭만적 상상도 해봄 직하다. 하지만 당시의 신분제가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았으리라.
●온달 설화의 역사적 배경
그러면 온달이 공주와 결혼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설화 내용과 실제 사건 전개 순서를 뒤집어 가정해 보자.
즉 온달이 뛰어난 무예실력과 북주와의 전투에서 세운 혁혁한 군공으로 말미암아 평원왕의 신망을 얻어 평강공주와 결혼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물론 하급귀족 출신이기에 왕실과의 결혼이 순탄치는 않았을 것이니, 이를 시기한 귀족들이 이 파격적인 결혼을 ‘바보와 울보의 결혼’이라고 빈정거렸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온달의 출세를 통쾌해하는 민간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울보’인 공주가 궁을 나와 ‘바보’인 온달과 결혼하였다는 식으로 흥미진진하게 바뀌어 갔을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적 요소는 물론 허구다. 그러나 거기에는 당시의 사회상이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다.
예컨대 온달과 같이 밥을 빌어먹는 가난한 평민들, 공주와 결혼한 온달이 황금 팔찌를 팔아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처럼 새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 그리고 온달처럼 전쟁터에서 세운 공으로 관직을 얻어 하급귀족으로 진출한 계층 등 당시의 사회변동 속에서 나타난 여러 형태의 인간상을 엿볼 수 있다.
온달은 고구려 사회의 그런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인 셈이다.
임기환 한신대 학술원 연구원
▼온달 전사한 ‘아단성’ 위치는…▼
온달은 “계립령과 죽령 서쪽의 땅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출정한 후 아단성(阿旦城) 아래서 전사했다고 한다.
계립령은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를 잇는 옛길인 하늘재이며, 죽령은 충북 단양군과 경북 풍기군을 잇는 오늘날의 죽령으로, 이 일대는 삼국간에 쟁패가 치열했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런데 정작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의 위치를 둘러싸고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중 아단성을 지금의 서울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성으로 보는 견해와 단양군 영춘면의 온달산성 일대로 보는 두 견해가 유력하다.
아차산성설은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주 충돌 지역이 한강 하류 일대임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 설의 주장자들은 ‘단(旦)’이 ‘차(且)’가 된 것은 조선 태조의 이름 ‘단(旦)’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현재 좀 더 지지를 얻고 있는 견해는 ‘온달산성’설이다. 이곳의 고구려 때 지명이 을아단(乙阿旦)이었다는 점이나, 계립령 및 죽령과 온달산성이 가깝다는 점이 중요한 근거가 된다.
또 이 지역에 온달 설화가 많이 남아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지금 남아있는 온달산성 자체는 신라 때의 산성이다. 결국 온달은 죽어 신라 산성에 자신의 이름을 남김으로써 생전의 한을 푼 것일까.
P.S: 온달 사후에 단양에 신라가 성을 쌓고 적성비를 세웠습니다. 국보 제 몇호라는데.. 거기보면 신라에 충성하는 백성은 상을 내린다는 귀절이 있다고 합니다.
이로보아 고구려가 그 이전까지 한강 이남 단양까지 그 세력을 계속 유지해 왔음을 알수 있지요. 삼국사기나 그런것도 신라가 쓴것이기에 정확한 고구려 정사는 많은 연구를 거쳐야 할 것입니다.
바보 온달은 아마도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유명한 고구려인의 한 사람일 것이다.
‘삼국사기’ 온달전의 기록을 보면 가난하고 바보스러운 온달이 평강공주와 결혼한 후 무예를 닦아 매년 3월 3일에 열리는 수렵 행사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해 평원왕(재위 559∼590)의 눈길을 끌었고, 북주(北周)의 침입 때 큰 공을 세워 대형(大兄)이란 벼슬과 함께 정식으로 부마로 인정받았다.
그는 영양왕(재위 590∼618) 때 한강 유역의 땅을 회복하려고 출정했다가 아차성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이렇게 온달 이야기는 매우 설화적이다. 그러면 과연 온달은 설화의 주인공에 불과한가, 아니면 실존했던 인물인가.
●대외적 어려움의 시대에 탄생한 ‘온달’
당시 고구려가 처했던 국제정세를 보면 온달과 같은 행적을 보인 인물이 충분히 있음 직하다.
6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는 남북 양쪽에서 대외적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서북의 랴오둥(遼東) 쪽에서는 북제·북주 및 돌궐이 세력을 확장해 큰 위협이 되었으며,
남쪽으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가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는 랴오둥 지역에서 기존의 세력권을 유지하는 한편 신라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회복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영웅적인 행적을 남긴 인물이 역사상 실존했을 가능성은 높다.
아마도 당시 고구려의 대외전쟁에서 혁혁한 명성을 떨친 인물이 있었으며, 그러기에 신라와의 전투에서 발생한 그의 죽음은 더욱 안타깝게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리라.
그의 행적은 일종의 영웅담으로 윤색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하나의 설화로 전해지게 된 것은 아닐까. 아마도 그 인물의 이름이 ‘온달’이었을 것이다.
●온달은 평민인가 귀족인가
온달 설화가 더욱 관심을 끄는 이유는 가난하고 미천한 온달이 가장 존귀한 신분인 평강공주와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결혼하고 마침내 위대한 장군이 되었다는 이야기, 즉 비현실성에 있다.
근래 우리 사회에 ‘온달 콤플렉스’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이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란 말을 뒤집어서 소위 돈과 권력을 갖춘 집 딸과 결혼하려는 젊은 남성들의 결혼 세태를 풍자하는 말일 것이다. 과연 온달은 공주와의 결혼으로 출세한 인물인가.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지식에 비추어 보면 평민인 온달과 평강공주의 결혼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과연 역사적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신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온달이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면 그가 평원왕의 부마라는 사실도 허구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신분제를 고려할 때 공주와 결혼한 온달은 결코 가난한 평민 출신일 리 없다.
그렇다고 온달을 명문 귀족으로 보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온달 설화의 핵심은 온달과 평강공주의 지극히 비정상적인 결혼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온달이 평민 출신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가 평원왕의 부마가 되는 것이 세간에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출신이 낮았을 것이다. 아마도 왕실과의 통혼(通婚)권에서 벗어나 있던 하급 귀족 출신이 아닌가 한다.
당시 고구려의 신분제를 알기는 어렵지만, 대략 관등제를 보면 3, 4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온달설화에서 본래 평강공주와 결혼할 예정이었던 상부 고씨라는 인물은 최고 귀족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고구려 말기 연개소문 집안의 예처럼 대를 이어 최고 관직을 독점했다. 그 아래 중급 귀족이 있어 고구려 지배층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으며, 온달의 경우처럼 하급귀족 신분도 상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온달이 평강공주와 파격적인 결혼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이때도 자유연애는 있었을 터이니, 두 사람이 깊은 사랑에 빠져 신분의 격차를 뛰어넘었을 것이라는 낭만적 상상도 해봄 직하다. 하지만 당시의 신분제가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았으리라.
●온달 설화의 역사적 배경
그러면 온달이 공주와 결혼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설화 내용과 실제 사건 전개 순서를 뒤집어 가정해 보자.
즉 온달이 뛰어난 무예실력과 북주와의 전투에서 세운 혁혁한 군공으로 말미암아 평원왕의 신망을 얻어 평강공주와 결혼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물론 하급귀족 출신이기에 왕실과의 결혼이 순탄치는 않았을 것이니, 이를 시기한 귀족들이 이 파격적인 결혼을 ‘바보와 울보의 결혼’이라고 빈정거렸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온달의 출세를 통쾌해하는 민간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울보’인 공주가 궁을 나와 ‘바보’인 온달과 결혼하였다는 식으로 흥미진진하게 바뀌어 갔을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적 요소는 물론 허구다. 그러나 거기에는 당시의 사회상이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다.
예컨대 온달과 같이 밥을 빌어먹는 가난한 평민들, 공주와 결혼한 온달이 황금 팔찌를 팔아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처럼 새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 그리고 온달처럼 전쟁터에서 세운 공으로 관직을 얻어 하급귀족으로 진출한 계층 등 당시의 사회변동 속에서 나타난 여러 형태의 인간상을 엿볼 수 있다.
온달은 고구려 사회의 그런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인 셈이다.
임기환 한신대 학술원 연구원
▼온달 전사한 ‘아단성’ 위치는…▼
온달은 “계립령과 죽령 서쪽의 땅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출정한 후 아단성(阿旦城) 아래서 전사했다고 한다.
계립령은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를 잇는 옛길인 하늘재이며, 죽령은 충북 단양군과 경북 풍기군을 잇는 오늘날의 죽령으로, 이 일대는 삼국간에 쟁패가 치열했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런데 정작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의 위치를 둘러싸고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중 아단성을 지금의 서울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성으로 보는 견해와 단양군 영춘면의 온달산성 일대로 보는 두 견해가 유력하다.
아차산성설은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주 충돌 지역이 한강 하류 일대임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 설의 주장자들은 ‘단(旦)’이 ‘차(且)’가 된 것은 조선 태조의 이름 ‘단(旦)’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현재 좀 더 지지를 얻고 있는 견해는 ‘온달산성’설이다. 이곳의 고구려 때 지명이 을아단(乙阿旦)이었다는 점이나, 계립령 및 죽령과 온달산성이 가깝다는 점이 중요한 근거가 된다.
또 이 지역에 온달 설화가 많이 남아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지금 남아있는 온달산성 자체는 신라 때의 산성이다. 결국 온달은 죽어 신라 산성에 자신의 이름을 남김으로써 생전의 한을 푼 것일까.
P.S: 온달 사후에 단양에 신라가 성을 쌓고 적성비를 세웠습니다. 국보 제 몇호라는데.. 거기보면 신라에 충성하는 백성은 상을 내린다는 귀절이 있다고 합니다.
이로보아 고구려가 그 이전까지 한강 이남 단양까지 그 세력을 계속 유지해 왔음을 알수 있지요. 삼국사기나 그런것도 신라가 쓴것이기에 정확한 고구려 정사는 많은 연구를 거쳐야 할 것입니다.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