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잔차에 입문한지 약 한달이 안됬습니다.
아직은 입문용으로 주위의 산과 들을 타도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남들과같이 장거리 투어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요즈음 한창 자전거에 빠져서 음 요번 토요일은 어디로 쏠까 하고 궁리하면서 일주일을 보냅니다. 아님 일찍 퇴근하면 근처 폐염전이나 인천 대공원 근처를 부지런히 밟아라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언덕이 꽤 힘들더니 요즈음은 그러저럭 악악 거리고 올라갈려고 하고 웬만한 언덕은 타고 내려 올려고 합니다. 하지만 오토바이로 내려오는 만큼 험로는 안되고, 풀샥인가 뭔가로 바꾸면 거의비슷하게는 내려 올수있을것 같습니다.
오늘은 좀 일찍 끝나서 자건거에 몸을 싣고 인천 대공원을 갈려고 작은 산속의 길을 라이딩 하면서 불어오는 바람과 숲 내음 흔들리는 나무 잎새, 그리고 해거름의 풍경이 다가올때 문득 옛날 자전거를 배우고 시골길과 신작로를 달린 기억이 났습니다.(아마 70년대 초반일겁니다)
지금은 자전거 박물관에 가야 볼수있는 까만 자전거(앞 포크나 뒸 포크에 발전기가 붙어 있어 바퀴에 닿게 해서 밤에는 불을 밝혔고, 체인을 덮는 덮개가있습니다)를 처음으로 배운답시고, 프레임 사이로 다리를 넣어서 자전거를 배웠습니다.
(키가 작아서 페달에 발이 안닿기 때문에..)
그당시의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은 달구지 한대가 지나갈수있는 넓이에 자갈로 덮여 있는 지금으로 얘기하면 임도수준 이라고 보시면 될것입니다.
그런 길을 지나면 신작로가 나오는데 한시간에 한번 꼴로 버스가 뿌연 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그런 길입니다.
그때만 해도 자전거의 용도는 어른들이 장날 나들이 때나 먼곳에 출타 하실때 이용하셨고 좀 지나서는 중학생, 고등학생들의 통학용으로 많이 사용되고 했습니다.
지금이야 엠티비에서 엎힐 다운힐 하지만 그때를 생각해 보면 기어도 없는 그런 자전거로 그 가파른 시골길을 올라가고 또 바퀴에 바람을 최대한 넣어서 내리막길을 차보다 더 빠른 속도로 우당탕하면서 내리 꽂은 생각을 하면 결국 옛날의 시골길을 현재 다시 찾아나서는 향수의 엠티비가 아닌가 싶군요.
빵꾸 때우는것도 튜브를 꺼내서 빵꾸 난곳을 샌드 패이퍼로 문지른 다음 폐 튜브를 알맞게 잘라 본드로 붙여서 사용하곤 했습니다.
또다른 자전거는 우체부들이 타고오는 빨간 자전거가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일반 자전거보다 조금 좋았던거 같습니다.
우체부 아저씨들이 편지와 소포등을 집집마다 전하면서 잡다한 심부름(예를들면 읍내나 면소재지에서 비누니 기타 필요한 일용품등을 사다주기도 했습니다)도 해주고 끼니때가 되면 아무 집이나 밥한상 차려와 같이 먹는 아주 전형적인 시골 풍경속에 자전거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땅거미가 질려하는 아스라한 둑방길을 여학생을 뒤에 태우고 저녁노을속으로 쿵당거리는 가슴을 숨기며 자전거가 흔들릴때 어쩌다 스치는 손길에 너무나 황홀했던 그런 추억이 자전거에 묻어 있습니다.
어른들이 장에 갔다 오시면서 술한잔에 불콰해지신 얼굴로 자전거를 바치시고 짐받이에서 신문지로 싼 고등어 자반이며 아이들 사탕, 기타 생활 일용품등을 내리시면서 아이들에게 사탕봉지를 주면 우리는 좋아라하고 마당을 뛰어다녔고 그런 모습을 인자한 얼굴로 바라보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더운 여름에 친척집을 자전거로 다녀 오면서 우물가에서 한 두레박의 물을 끼얹고, 팽나무 느티나무 그늘에서 쉬다가 물가에서 멱감고...
자전거에 달린 발전기로 물고기를 잡는다고 전기선줄을 연결하여 부지런히 페달을 밟아보지만 여간해서는 고기가 안죽어 다시 갖고간 족대로 물고기를 잡았던 기억도 납니다.
이런 아스라한 추억이 언제인가 자전거가 오토바이로 바뀌고 오토바이가 차로 바뀌면서 애환이 서려있는 자전거는 세월과 더불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요즈음은 시골 어딜가도 집앞까지 다 시멘트로 포장되어있고 웬만한 길은 포장되어있어 예전의 정취를 느끼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오늘 산길을 라이딩 하면서 예 추억에 자전거가 오버랩되어 몇자 적었습니다
아직은 입문용으로 주위의 산과 들을 타도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남들과같이 장거리 투어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요즈음 한창 자전거에 빠져서 음 요번 토요일은 어디로 쏠까 하고 궁리하면서 일주일을 보냅니다. 아님 일찍 퇴근하면 근처 폐염전이나 인천 대공원 근처를 부지런히 밟아라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언덕이 꽤 힘들더니 요즈음은 그러저럭 악악 거리고 올라갈려고 하고 웬만한 언덕은 타고 내려 올려고 합니다. 하지만 오토바이로 내려오는 만큼 험로는 안되고, 풀샥인가 뭔가로 바꾸면 거의비슷하게는 내려 올수있을것 같습니다.
오늘은 좀 일찍 끝나서 자건거에 몸을 싣고 인천 대공원을 갈려고 작은 산속의 길을 라이딩 하면서 불어오는 바람과 숲 내음 흔들리는 나무 잎새, 그리고 해거름의 풍경이 다가올때 문득 옛날 자전거를 배우고 시골길과 신작로를 달린 기억이 났습니다.(아마 70년대 초반일겁니다)
지금은 자전거 박물관에 가야 볼수있는 까만 자전거(앞 포크나 뒸 포크에 발전기가 붙어 있어 바퀴에 닿게 해서 밤에는 불을 밝혔고, 체인을 덮는 덮개가있습니다)를 처음으로 배운답시고, 프레임 사이로 다리를 넣어서 자전거를 배웠습니다.
(키가 작아서 페달에 발이 안닿기 때문에..)
그당시의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은 달구지 한대가 지나갈수있는 넓이에 자갈로 덮여 있는 지금으로 얘기하면 임도수준 이라고 보시면 될것입니다.
그런 길을 지나면 신작로가 나오는데 한시간에 한번 꼴로 버스가 뿌연 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그런 길입니다.
그때만 해도 자전거의 용도는 어른들이 장날 나들이 때나 먼곳에 출타 하실때 이용하셨고 좀 지나서는 중학생, 고등학생들의 통학용으로 많이 사용되고 했습니다.
지금이야 엠티비에서 엎힐 다운힐 하지만 그때를 생각해 보면 기어도 없는 그런 자전거로 그 가파른 시골길을 올라가고 또 바퀴에 바람을 최대한 넣어서 내리막길을 차보다 더 빠른 속도로 우당탕하면서 내리 꽂은 생각을 하면 결국 옛날의 시골길을 현재 다시 찾아나서는 향수의 엠티비가 아닌가 싶군요.
빵꾸 때우는것도 튜브를 꺼내서 빵꾸 난곳을 샌드 패이퍼로 문지른 다음 폐 튜브를 알맞게 잘라 본드로 붙여서 사용하곤 했습니다.
또다른 자전거는 우체부들이 타고오는 빨간 자전거가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일반 자전거보다 조금 좋았던거 같습니다.
우체부 아저씨들이 편지와 소포등을 집집마다 전하면서 잡다한 심부름(예를들면 읍내나 면소재지에서 비누니 기타 필요한 일용품등을 사다주기도 했습니다)도 해주고 끼니때가 되면 아무 집이나 밥한상 차려와 같이 먹는 아주 전형적인 시골 풍경속에 자전거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땅거미가 질려하는 아스라한 둑방길을 여학생을 뒤에 태우고 저녁노을속으로 쿵당거리는 가슴을 숨기며 자전거가 흔들릴때 어쩌다 스치는 손길에 너무나 황홀했던 그런 추억이 자전거에 묻어 있습니다.
어른들이 장에 갔다 오시면서 술한잔에 불콰해지신 얼굴로 자전거를 바치시고 짐받이에서 신문지로 싼 고등어 자반이며 아이들 사탕, 기타 생활 일용품등을 내리시면서 아이들에게 사탕봉지를 주면 우리는 좋아라하고 마당을 뛰어다녔고 그런 모습을 인자한 얼굴로 바라보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더운 여름에 친척집을 자전거로 다녀 오면서 우물가에서 한 두레박의 물을 끼얹고, 팽나무 느티나무 그늘에서 쉬다가 물가에서 멱감고...
자전거에 달린 발전기로 물고기를 잡는다고 전기선줄을 연결하여 부지런히 페달을 밟아보지만 여간해서는 고기가 안죽어 다시 갖고간 족대로 물고기를 잡았던 기억도 납니다.
이런 아스라한 추억이 언제인가 자전거가 오토바이로 바뀌고 오토바이가 차로 바뀌면서 애환이 서려있는 자전거는 세월과 더불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요즈음은 시골 어딜가도 집앞까지 다 시멘트로 포장되어있고 웬만한 길은 포장되어있어 예전의 정취를 느끼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오늘 산길을 라이딩 하면서 예 추억에 자전거가 오버랩되어 몇자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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