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듣는다.
선택이 가능한 상황에서 나는 당초 차이코프스키 4번에 빠져들고 싶었다.
마음이 우울할 때면 가슴을 저며내는 슬라브 풍의 차이코프스키나 라흐마니노프 만한 선택이 없다.
그들을 듣고 있노라면 감정이 상승작용을 일르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드디어 가슴이 후련해 지는 '이상한 경험'을 하곤 했다.
베토벤 9번은 '환희'다.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달려가는 자식이 '환희'를 선택하다니....
비겁함일 것이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피해 보려는
역발상의 보호본능일 것이다.
이 상황에서 예 처럼 비가를 듣노라면 헤어나지 못할 심연에 빠질까 두려웠을 것이다.
아버지를 읺은 슬픔은 이세상 어떤 것보다 깊다.
동종 요법으로 해소 될 그런 하류의 슬픔과는 다르다.
전화.
전화는 왔다.
그 전화가 마침내 왔다.
'아버지 돌아 가셨다'
형님의 비장한 음성이다.
아무런 질문도 부언도 없었다.
우리 시대, 노부모를 둔 자식들이 숙명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그 '전화'의 공포
비보와 낭보를 전하는 수단이 전보에서 전화로 바뀐지가 언제부터이던가...
향년 96세
일찌기 상경하여 철도 노무원으로 일하시다
6.26 사변을 만나 5명의 자식들을 데리고 전라도 산골 고향으로 피난을 내려 가셨다.
거기서 자식 셋을 더 생산하시고 증손, 고손까지 40여명의 후손을 두셨으니
이승에 왔다간 흔적은 충분히 남기셨다.
한 세기 앞서 태어나셨지만
오늘의 기준으로도 혁신적인 분이셨다.
가령, 향이 없으면 담배 꽁초로 향을 대신해도 된다는 식으로.......
만근의 엄중함은 분명 가슴 깊숙히 가시고 계셨으나
자식들이나 며느리 들이나 손주들에게 한없이 인자하신 분이셨다.
내생의 격량기에
바보스러운 결정을 늘 존중해 주시고 묵언으로 격려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자식을 키우는 현재의 나로서도 참으로 경이로운 처신이셨다.
인천 공항 입국장에는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릴적 여름밤 동네 개울가에서 평생 우정 변치 말자고 언약한 그 친구다.
나는 서두르는 친구에게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르자고 하였다.
'아메리카노' 커피의 부드러운 향이 혀를 감싼다.
슬픔과의 상봉시간을 늦추려는 나의 심사를 알고 있는 친구는
말없이 기다려 준다.
아버지 영전에 분향재배 하고 나니 이제야 눈물이 흐른다.
나의 마음을 배반하고 눈물은 흐른다.
누님께서 손수건을 건네 주셨다.
아버니는 삼베 옷으로 갈아 입으셨다.
동갑이시던 어머니께서 14년전 돌아가시기 전에 손수
만들어 놓으셨던 수의다.
어머니는 70년대,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때 까지 삼을 키우시고 삼베 옷을 짜셨다.
스무자 한필을 꺼내어 행상과 흥정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머니는 그 삼베 판 돈으로 세간살이도 장만하고 자식들에게 귀한 운동화를
사주기도 하셨다.
아마도 아내가 재배하여 직조한 삼베 수의를 입는 행운을 누리신 분은 이시대에
아버지가 마지막일 것이다.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맞이하시고 얼마나 기뻐하실까...
당신이 준비해 둔 수의를 곱게 입고 나타난 아버지의 로열티에 오히려 어머니께서 감사해 하지는 않을까?
이러한 불순의 시대에...........
당신이 보아두신,
아내가 잠들어 있는 곁에
아버지를 묻을 때에도 나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아버지 오셨어요!'
여든을 바라보는 큰누나의 흐느낌에도 나는 울지 않았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 온 나.
이제서야 아버지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뼈저리게
느껴진다.
깊고, 넓고, 무겁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나의 '귀향'은 슬프다.
아버지의 '귀향'과 공존하지 못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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