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군고구마에 빠지다.

靑竹2008.12.08 01:08조회 수 1267댓글 18

  • 2
    • 글자 크기







▲작년엔가 코팅이 많이 벗겨졌다며

커다란 프라이팬을 버리려는 마누라를 말렸었는데

그 덕분에 올겨울에 아주 요긴하게 쓰고 있다.

집에서 군고구마를 굽기에는

이 철판(?)프라이팬이 참으로 안성맞춤인 것이다.



고구마를 은박지로 일일이 싸는 방법도 좋지만

그러려면 은박지가 많이 들므로  효율적이지 않다.

고구마를 켜켜이 쌓아도 이렇게 커다란 은박지로

프라이팬 위를 밀봉해 열기가 빠져나가는 걸 막아 주고

아주 약한 불에 한 시간 정도 서서히 구우면

겉은 물론 속까지 고르고 완벽하게 익는다.



맛?

물에 삶은 고구마의 맛과

불에 익힌 군고구마의 맛은

적어도 내 느낌으로는 천양지차다.

당연히 군고구마의 손을 들겠다.

호박고구마들에 둘러싸인 시커먼 놈은

타서 그런 게 아니고 껍질과 속살이 짙은 자주색인

자색고구마라는데 나도 오늘 처음 본다.

'얼렁 맛을 봐야지..푸헬헬헬'




[장모의 정성]

젊어서 낭군을 여의고 혼자가 되신 장모는

정말 대단한 여장부다.



4남매를 홀로 키워내면서도

빈농에서 논을 60여 마지기까지 늘린 양반이니

그네의 근검절약하는 생활이 얼마나 철두철미했는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이젠 당신께서 팔순이 넘으셨으니

자식들이 서울로 모시겠다고 해도

아무도 없는 촌가에서 막무가내로 홀로 지내신다.

가끔씩 들려 며칠씩 지내곤 하는 공간 즉,

아들들이 사는 도시의 아파트란 주거 공간이

그녀에겐 도무지 숨막히고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낮엔 불편한 다리일망정

내 밭과 내 논을 싸목싸목 다니며 돌보고

밤이면  아직 죽지 않고 버티고 있는  아래,위 또래 노인네들을

마실을 다니며 만나고 웃고 떠드는 일상이 몸에 절었으니

더구나 도시가 주는 답답함에 대한 거부감이 큰 것이다.



'따르릉'



"여보세요?  엄마야?"



"잉..오늘 고구마 몇 박스 보냈어.

우에 치는(위의 것은) 좀 상한 것잉께

싸게싸게 쪄서 먹어야 혀. 통화료 많이 나와.  끊어!!!"



'짤깍'





아무튼 고구마와는 원수지간이었던 내가

작년 가을 무렵부터 장모님 덕에 화해를 하게 되었다.



장모가 보내는 고구마는 그녀가 직접 농사지은 것이 아니다.

걷이를 끝낸 다른 집 고구마밭을

절룩거리는 불편한 다리로 돌아다니시며

미처 걷어가지 못한 고구마를 이삭을 줍듯 주우신 것인데

그러다보니 쇠스랑이며 호미에 찍혀 상채기가 난 게 태반이고

상한  것도 많았다.



"아이 참, 궁상맞게 뭘 이런 걸 다 보냈대?

버릴 게 태반이네. 하여간 노인네가 씨잘데기 없는 일을 해요"



마누라는 내 눈치를 흘끔 살피며

불경스럽게도 제 어미를 타박하는 시늉을 냈다.

난 그런 마누라를 잠시 바라보고는

이내 고구마를 이리저리 뜯어보고 난 뒤

참으로 오랜 동안 상념에 젖어들었었다.



'대관절 장모는 마실을 다니기도 힘든 걸음걸이로

이 정도의 고구마를 모으시려 얼마나 고생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든 건 물론이었고

고구마에 얽인 가난한 시절의 지긋지긋한 기억이

주마등같이 이어지며 더욱 상념에 잠겼더랬다.



주책없는 마누라는 그런 나의 모습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다

또 헛소릴 했다.



"여보? 이거 그냥 내다 버릴까요?"



"응? 무슨 소리야? 벌받을 소릴?"





철천지 원수라 입에 대지 않았던 고구마였다.

커다란 양푼에 담아 수돗물에 흙을 씻어내고

상하고 병든 데를 꼼꼼하게 도려내는 등

도시로 이사온 뒤 처음으로 그 원수를 정성스레 다듬어

솥에 쪘다.





'뚜르르'



"엄마!  나야"



"잉..왜?"



"손서방 참 희안한 양반이네?"



"왜 그란디?"



"다른 건 안 먹고 곧잘 버리는 양반이

엄마가 보내 준 고구마는 버리는 거 하나 없이

어찌나 결사적으로 다듬어서 쪄 먹는지 정말 신기해.

나도 질리고 애들도 질려서 이제 아무도 안 먹는데

그 많은 고구마를 손서방 혼자 다 먹었다니까요?

이 냥반이 평소 고구마가 싫다며 입에 대지도 않았다는 거 아뉴"



"얼래? 뭔 일이다냐? 별일이네.호호호"



뭐 하나 그녀에게 해 드리지 못한

지지리도 못난 사위지만

장모는 그런 사위가 자신이 보낸 고구마를

맛있게 먹었다는 소식에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단다.



이젠 사위에게 고구마를 보내는 일이

그녀의 커다란 낙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보낸 고구마를 먹으며

젊어서 과부가 된 한 여자의 가엾은 한을

조심스럽게 맛본다.



찢어지게 가난해서 일년 중 대부분을

고구마만 줄창 먹고 사는 어린시절이었기에

고구마를 향한 철모르는  적대감은 실로 대단했었지만



그녀가 보낸 고구마를 먹으며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리운 시절을

가슴이 아프도록 그리며

고구마에게 화해를 구하고 용서를 빌며 먹는다.



그녀가 보낸 고구마를 삶으면

수확한 고구마를  두 가마니나 지셔서

다리가 부러질 듯한 지게를 버겁게 지시고

고개를 둘이나 넘도록 쉬지 않으시던

아버님의 어깨에서 무럭무럭 피어오르던

땀냄새 물씬 풍기던 그 김이 솥에서 피어오른다.



고구마를 먹으며 자주 눈을 흐린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었다니'



'그게 고구마라니...'







아무튼 작년에 4박스,

올해 4박스, 참 많이도 먹었다.

거의 나 혼자서 먹은 것이다.

올해분 마지막 두 박스는 모두 구워서 먹었다.



고구마 만세!!

군고구마 만세!!!




남자 육상 백미터의 신기록 보유자인 우사인 볼트가
고구마와 비슷한 얌이란 뿌리식물을 많이 먹어서
그런 불가사의한 힘을 낼 수 있다고 서방의 과학자들이
분석했더군요.

혹시 고구마를 많이 먹으면
자전거도 잘 타게 되지 않을까요?

=3=33=3333




나는 자전거가 좋다






















  • 2
    • 글자 크기
컥 시마노 가격 인상...20%.. (by scifo10) . (by z3turbo)

댓글 달기

댓글 18
  • 여기저기 상처나서 발라낸
    손가락만한 고구마를 보고는
    누가 또 이리 궁상일까 생각했습니다

    마눌이
    고구마를 캘 때면
    부득이 자기가 하겠다고 나가서는
    심지어 새끼손가락만한 뿌리까지 거둬옵니다
    도회지 물이 덜 빠진 제가
    그 뭔 궁상이냐고 소리지르면
    땀흘려 농사지은게 아까워서 그런답니다
    한데 정작
    그 새끼손가락만한 고구마
    쪄 놓으면
    죄다 제가 먹습니다




    땀에 절어 허옇게 소금꽃 핀
    아버지의 어깨

    세상뜨신지
    30년도 넘은 아버지를
    그립게 하시는군요.
  • 늘 말씀을 재밋고 아름답고 또 재치있게 하시는 청죽님 글의 애독자입니다.
    오늘 글은 청죽님의 너무나 따뜻한 맘의 숨겨둔 한 켠을 훔쳐 보는듯해서 감사한 맘에 이새벽에 글을 올립니다.배우자분이 참행복하겠습니다.제 컴퓨터 앞에도 어제쪄둔 고구마가 놓여 있습니다.
  • 육포를 같이 구웠나 했는데,,,
  • 가슴 뭉클한 고매 이야기였습니다~~ 초록색깔 글씨는 언제 봐도 좋단 말입니다^^
    고매-->고구마 , 물고매-->물고구마 ㅋㅋ
  • 靑竹글쓴이
    2008.12.8 11:57 댓글추천 0비추천 0
    하이고메~가스나야! 고매 고마 무라!
    (고구마 그만 먹어라!) 맞쥬?
  • 고구마 먹고 몇일전 체해서... 요즘은 멀리하고 있죠. ^^;
  • 저도 어린 시절에
    고구마밥을 꽤나 먹어
    고구마라면 질색을 합니다.
    군고구마건, 찐고구마건...
    반대로 아내는 꽤나 고구마를 좋아해서
    간간히 장에서 사오는 고구마는
    언제나 아내 차지이지요.
    장모님이 보내주신 구수한 고구마...
    괜히 읽으며 입안 가득 침이, 가슴에 뜨끈한 무엇이 고이는군요.
    날 추운데 따스한 글 잘 봤습니다.
    그 맛있는 장모님표 고구마 오래오래 드시길 기도합니다.
  • 고구마는 아니지만 어머니들의 음식솜씨는 거의 예술수준 갔습니다.
    청죽님 고마우신 장모님을 두셔서 넘 행복하시겠습니다. 저도 처가집만 갔다오면
    3키로씩은 쪄서 오는거 같습니다. 맛있다보니 자꾸 손이가서리 몸이 힘들어요^^
    청죽님 연말 행복하고 건강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꾸우벅!
  • 고구마 굽는 솜씨나 글솜씨가 가히 예술입니다. 읽으면서 가슴 한 켠이 뭉클했다는.....
  • 같은 내용이어도 그 마음을 어떻게 글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있는것을 느낍니다. 내용도 문체도 표현도 참 좋네요. 자주 좋은글 올려주십시요.
  • 고구마 구우신 솜씨가 예술이십니다 ..아 한입께물고 동치미국물 꿀꺽마시면.......
  • 침넘어갑니다. 청죽님!
  • 고구마 ~~~ 몸에도 좋고 맛도 좋아요....
    갑자기 고구마가 먹고 싶네요 ^-^*
  • 우덜 나라가 그 잿더미 속에서 밥이나 굷지 않게 된것은
    그 8할이 '어머니' 덕이라 생각합니다.

    한동안 주위에서 고구마가 안보이더니..요즘 도회지에서도 자주 보여서 반갑기 그지 없네요.
    저도 식탁에 고구마 쪄 놓으면..수줍은 물고기 미끼 채어가듯 오다 가다 한두개 집어서 잘
    먹고 있습니다.
  • 靑竹글쓴이
    2008.12.9 01:54 댓글추천 0비추천 0
    다 떨어졌습니다. 탑돌이님. 흑흑
    탑돌이님 댁 인근을 어슬렁거리다
    저도 어물쩍 두어 개씩 집어먹어도 될른지요?

    =3=33=3333
  • 동 떨어진 답 글인데...

    오늘에야 청죽님이 "손"씨 성을 지닌 사람이란 것을 알았심다...ㅋㅋ
  • 군 고구마는 좀 먹는데
    구워 주질 않네요. 마누라가~~

    가끔 날 고구마는 까 먹는데
    어렷을 때 하도 많이 먹어서 그런가
    생각이 없습니다.

    靑竹님처럼 구워 먹어 볼까나?
  • 김치에 얹어먹으면 캬...~~~ 배고파 지는 군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드디어 복구했습니다. 와일드바이크 심폐소생의 변!39 Bikeholic 2019.10.27 2750
180536 요즘은 약간은 조용한 것 같기도 하고 해서 가끔은 듣고 싶었던 노래를...1 열린마음 2008.12.08 738
180535 취업 시장 이야기...3 dhunter 2008.12.08 1015
180534 결국 샥 뜯었습니다.3 bycaad 2008.12.08 1076
180533 애노시마2 baddk3 2008.12.08 1880
180532 댓글로 조의를 표해주신 모든분들 고맙습니다...^^;;11 mtbiker 2008.12.08 1138
180531 컥 시마노 가격 인상...20%..11 scifo10 2008.12.08 1969
군고구마에 빠지다.18 靑竹 2008.12.08 1267
180529 .8 z3turbo 2008.12.08 1455
180528 믿을사람 하나도 없구나...9 산아지랑이 2008.12.08 1394
180527 외곽도로 진입용 고가다리위 결빙으로 발생한일4 jsoo 2008.12.07 1072
180526 편의점 앞에 있는 아이들5 kxh21 2008.12.07 1224
180525 자전거그림파일구합니다 ronin78 2008.12.07 637
180524 잔차가없어졌어요4 choisung61 2008.12.07 1082
180523 눈 ^^3 speedmax 2008.12.07 821
180522 초상권 침해(?) 땜시...5 뽀스 2008.12.07 1165
180521 고통에 익숙한 세대11 靑竹 2008.12.07 1054
180520 군밤장수 모자6 靑竹 2008.12.07 2017
180519 뽀스,우현님은 반성하라,반성하라..9 산아지랑이 2008.12.07 866
180518 날씨가 엄청나게 춥습니다.15 Bikeholic 2008.12.06 1024
180517 자전거가 불쌍하다.7 靑竹 2008.12.06 860
첨부 (2)
S5000007.JPG
1019.0KB / Download 0
S5000010.JPG
879.2KB / Download 0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