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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이 먼 취미레요?`

........2000.10.30 19:27조회 수 411추천 수 1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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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35분, 월둔교에서 약 5백미터 정도 떨어진 농가 앞에서 개짖는 소리를 들으며 방태산 탐사 수원 특별팀은 추위에 떨려오는 몸을 잔차위에 싣고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대장정에 올랐다.

자갈밭이었다. 돌들의 향연... 큰돌, 작은돌, 맨질맨질한 돌, 거칠고 날카로운 돌, 땅에 대짜로 누운돌, 차렷자세로 박혀있는 돌, 어슬렁거리는 돌, 이러저리 싸돌아다니는 돌, 서로 악수하는 돌, 씨름하는 돌, 올라타고 이상한 짓 하는 돌(?), 돌돌돌 돌들.... 화가 치밀어올랐다. 근육의 긴장을 잠시라도 풀었다간 그대로 뒷바퀴가 날나리 돌들에 미끌어져 잔차에서 내려야할 판이다. 주위의 추위 때문에 물은 싸늘히 식어갔지만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된다.

드디어 출발한지 50여분만에 아침가리골로 내려가는 길과 구룡덕봉으로 올라가는 길로 갈라지는 삼기리 -- 월둔고개에 올라섰다. 이제부턴 짱똘들 좀 덜 보이겠지.. 그러나 헛된 기대였다. 거기서 구룡덕봉 정상까지도 돌들의 향연은 그칠 줄 몰랐다. 왕창님은 죄없는 하늘에다 대고 소리소리 지르며 욕을 해대시는 걸루 업힐의 고통을 줄여보려 하신다. 따라해봤다. 효과가 없다. 괜히 힘만 뺏다. 왕창님 체력은 정말이지 놀라울 따름이다. 소리지를 힘이 아직 남아계신 거다.

12시 30분. 2시간 여만에 10킬로 남짓되는 업힐 짱돌 로드쑈 장을 통과해서 구룡덕봉 정상에 도달했다. 머야 이거? 걍 공터다. 주변에 키낮은 잡목들과 잡풀들만 무성하고 헬기 착륙장 덩그러니 하나 있고 군 통신장비 시설물이 철조망을 두른채 떡 버티고 있는 것 말고는. 그러나 주변으로 보이는 강원도의 준봉들은 그야말로 장관 그 자체였다. 올라온 길 오른편 아래로는 방태산 휴양림으로 내려가는 능선이 병풍처럼 벋어있고 왼쪽으로는 지도에서 눈독을 들여놓았던 개인산 능선이 장엄하게 누워있었다.

추웠다. 잔차에서 내리자 마자 가쁜 숨이 잦아들자 마자 땀은 싸늘하게 식고 온몸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저지가 없는 온바이크는 이런 사태가 올 줄 미리알고 옷을 다 두벌씩 가져왔던 터다. 재빨리 젖은 옷을 벗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그 황량한 공터 한 가운데 헬기 착륙장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왕창님 사모님께서 공양해주신 김밥을 먹었다. 상상해보라.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서 아무도 없는 1400미터 산꼭대기 황량한 헬기장 한가운데 세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 오들오들 떨며 김밥을 먹고 물통의 물을 돌려마시고 있는 모습을 -- 게다가 그 남자들 중 한눔은 가뜩에나 성기게 난 머리숱이 땀과 헬멧 자국에 유린되어 제멋대로 뻣쳐있고 수염은 덥수룩하고 얼굴은 땀과 먼지로 얼룩져 그야말로 폐병말기 환자의 몰골을 하고 있었다!

식사 후 산 아래를 굽어보면서 원래 계획대로 저 능선을 따라 내려가 방태산 휴양림까지 가서 다시 맞은 편 능선으로 올라오기엔 시간과 체력이 턱없이 모자란다는 데 의견을 모은 세사람은 계획을 반으로 뚝 자르기로 했다. 그래도 명색이 방태산 탐사이니 만큼 주억봉(방태산)까지는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개인산 능선을 타고 내려가 월둔교 아래쪽의 모래소 유원지로 내려오자는데 합의했다 -- 머 합의라기 보담 잘난채 하는 온바이크란 작자의 확고부동한 말투에 눌려 다른 두 분은 거의 찍소리도 못낼 분위기였다. 온바이크는 그 잘난 돌들의 향연을 다시 보기 싫었을 뿐만 아니라 올라온 똑같은 임도를 다시 내려간다는 건 이번 탐사여행의 의미를 무색케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곳의 임도는 여러번 오르락 내리락 해본 터였다. 그가 올해 마지막 투어라는 거창한 명분을 부쳐서까지 이 곳에 다시온 건, 지도상에 그려져 있는 능선을 타고 끝없이 내려오는 빨간 선 -- 등산로, 엠티비 전문 용어로는 싱글트랙 --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온바이크의 치명적 자만이었다.

진로를 수정한 탐사팀은 군통신 시설을 끼고 돌아 방태산(주억봉)으로 가는 능선으로 접어들었다. 장관이다. 군침이 절로 돈다. 저 길을 잔차로 간다면....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갈수록 길은 암벽사이로 비집어들고 잔차는 우리의 어깨와 등짝에 올라탄채 내려올 줄 몰랐다. 한 5백미터쯤 전진했을까, 능선상에서 마주오는 등산객들을 만나고 우리는 그들의 권유반 위협반에 떠밀려 방태산 공략을 포기하고 다시 길을 돌렸다 -- 그러나 나중에야 가슴을 치고 후회한 일이지만 어차피 들고다닐 운명이었으면 차라리 이 길로 계속 가는게 백번 더 나을뻔 했다.

다시 구룡덕봉으로 돌아온 우리는 내려가는 길 오른편으로 나있는 능선을 타고 개인산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온바이크가 지도를 보며 가장 군침을 당겼던 코스다. 그러나 온바이크는 자신이 육방출신이란 것과 그래서 독도법에 서투르다는 것, 그래서 지도를 보고 가졌던 생각이 순진멍청한 망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곧 뼈져리게 깨닫게 된다. 지도에 나타난 등고선은 아무리 자세한 지도라 해야 3백미터 간격으루 그려져 있을 뿐이다. 그 300미터 사이에 어떤 기가막힐 난관이 있어도 지도는 아무 말이 없다. 책은 행간을 읽어야 하지만 지도는 등고선간을 읽어야 한다. ㅜ.ㅜ

초입은 깊이 쌓인 낙엽에 간간이 낙엽위로 도드라져있는 돌뿌리 정도로, 그럭저럭 타고갈 만은 했다. 다만 철쭉인지 진달랜지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면서 호객하는 삐끼들처럼 잔차와 팔다리를 잡고 늘어질 뿐이었다. 그러나 첫번째 봉오리를 지나고 나서부텀 길이 사람이 사지를 모두 이용해야 겨우 갈 수 있는 그런 길로 변하기 시작했다. 칼같는 능선에 끊임없이 앞을 가로막는 바위와 가파른 준봉들... 군데 군데 타고내려갈 만한 곳에서는 절대 기회를 놓치지않고 안장위에 올라탔지만 전체 능선 중에서 잔차를 타고 왔던 부분은 10분의 1도 못됐다.

첨에는 저 봉우리만 넘으면 내리막이 시작되겠지, 그러다 첫 봉우리 꼭대기에서 다음 봉우리를 보게되면 아, 명색이 1300고진대 이렇게 쉽게 끝날리는 없을거여, 그렇게 해서 넘은 봉우리가 얼추 7개 정도는 될 것이다. 처음에는 각오를 새롭게 다지고 그 다음에는 자신을 원망하고 그 다음에는 산한테 화가 나고 그 다음에는 슬퍼지고 그 다음에는 산한테 징징거리며 사정하고 싶어지고 그 다음에는 절망적이 되고 그 다음에는 기도하고 싶어진다. 마지막에는 제발 여기만 내려갈 수 있게 해주면 무슨 짓이라도 다 하겠습니다요 예? 산님...이렇게 된다.

정말 우리는 잔차를 끌고 모르는 험한 산길을 갈 때 사람이 겪게되는 심리적 변화가 몇단계가 있는지 그걸 다 체험하고 온 것이다.

능선을 타고 가도가도 능선이 낮아질 줄 몰랐다. 가파른 절벽을 잔차와 함께 미끌어져 한참을 내려왔나보다 싶으면 또 내려온 것 보다 더 가파른 암벽 봉오리가 눈앞에 버티고 있고 그걸 피해 능선 옆으로 내려가려고 아래를 보면 길 없는 낭떠러지고 .... 그렇게 미친 듯이 능선을 따라 오르락 내리락을 3시간 넘게 했는데도 능선은 하나도 낮아져있질 않았다. 눈 아래로 내린천이 구비구비 흐르는게 보이고 그 가로 임도도 보이는데 산은 낮아질 줄 모르고, 정말이지 그대로 뛰어내려서 내린천 가운데 떨어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아무리 육방출신 까막눈으로 보아도 지도상으론 완만하게 하강하는 능선이었다. 이렇게 깍아지르듯 오르락 내리락하는 길은 분명 아니었다. 길을 잘못 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어쩌랴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고 군대군대 잔나무 가지에 묶여있는 강동산악회라고 쓰인 조그만 빨간색 리본을 등대삼아 전진 계속 전진... 그러던 중 왕창님은 깍아지른 듯한 비탈을 잔차와 함께 미끌어져 내려오다 소나무에 옆구리를 들이받으셔서 심한 통증을 호소하시고...

한 참을 가던 중 드디어 절벽의 끝에 도달했다. 그 아래로 빨간 리본이 묶여있고 길 같은게 나있는 걸루 봐서 내려가는 길인 듯 하긴 한데 이건 정말 네발로 주위의 모든 돌출물들을 다 이용해야 내려갈 수 있는 길이다. 눈 아래 펼쳐진 광경을 보는 순간 온바이크는 사지에 맥이 탁 풀렸다. 공포가 엄습해왔다. 정말 우리는 이 산을 내려갈 수 있을까? 뒤따라 와서 같은 광경을 본 왕창님과 얼~~~님도 그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참을 아무말 없이 있다가 왕창님이 비장하게(이건 정말 농이 아니었다) "여길 해지기 전까지 못내려가면 119 부릅시다" 하셨다. 그때 시간이 오후 5시 10분.

얼~~~님은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물이 유일하게 남아있던 왕창님의 수통을 잃어버려서 우리는 한 병 남은 박카스를 서로 돌려 먹었다. 비장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일어났다. 그냥 미끌어졌다. 미끌어지다 나무나 돌에 몸이나 잔차가 걸리면 잠시 멈취서고 다시 균형잡고 또 미끌어지고.... 한번은 계속 미끌어져서 멈춰지질 않게 된 온바이크, 갑자기 큰 충격과 함께 다행히 멈취섰는데 어떻게 서게 됐나 살펴봤더니 팔뚝만한 소나무 가지 부러진 게 미끌어지는 방향으로 같이 묻어서 미끌어지다가 그것이 옆의 소나무 등걸에 수직으로 걸리면서 잔차 프레임과 소나무 등걸 사이에 버팀목 역할을 해준 것이었다.

이건 Downhill이 아니다....Drophill이다. 떨어지면서 주위를 살펴보니 육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 조금만 더 가면 되겠구나.... 한 참을 그렇게 떨어지다 칡덩쿨과 잡목으로 거의 터널이 되다 시피한 오솔길을 만났다. 다 내려왔다. 덩쿨사이를 헤치고 나오니 우렁찬 내리천 소리에 지금은 문이 닫힌 식당 건물, 그리고 그 앞으로 임도가 드러났다. 우리는 잔차를 세우고 정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달려가 얼싸안고 소리질렀다. "살았따아아아!!"

잠시 후 마음을 가라않히고 모두들 집에 전화를 건다. 목소리가 어느때보다도 차분하다. "엄마야?/ 당신이야? /딸내미?" "응, 이제 산 다타고 내려왔어" 너무나 절묘한 타이밍 임도로 내려서니 날은 완전히 어두워진다. 왕창님과 얼~~~님의 라이트의 도움으로 상남에서 월둔삼거리까지이어지는 지방도를 칠흙같은 어둠을 뚫고 도로 양면을 다 휘저으면서 달려올 수 있었다. 얼~~~님의 자작 라이트도 왈바 라이트 못지않게 엄청난 성능을 보여줬다. 자칭 "얼라이트." 앞으로 계속 업그레이드 버젼을 선보일 계획이란다.

20여분간의 온로드 야간 라이딩 후 우리는 월둔 삼거리의 촌두부 전골집에 도달했다. 작년 친구놈과 여기 왔을때 이 집 음식맛과 주인 내외분의 친절이 인상깊어 잊지 못하고 있었던 터라 온바이크는 동행들을 꼬셔서 그 집에 든다. 온바이크의 너스레에 두 내외분은 작년에 왔던 사람이 잊지 않고 또 찾아줬다는 데 너무도 감읍한 나머지 융숭한 대접을 해 주셨다. 특히 식사 후에는 손수 봉고를 몰고 월둔교까지 데려다 줘서 피로에 지친 우리가 그 추운 밤길을 다시 라이딩해야 되는 수고를 덜어주셨다. 다시한번 그 내외분께 고마운 맘을 전하고 싶다.

삼둔 사가리 일대의 터줏대감을 자처하시는 주인 아저씨께서 오늘 우리들이 돌고온 일정을 궁금해하시길레 일러드렸더니, 다짜고짜 주인 아주머니께서 말을 끊고 끼어드신다. "그거 취미로 하는거 맞드레요? 그거이 먼 취미레요, 목숨걸고 하는 거지."

주인아저씨는 온바이크가 어디쯤에서 길을 잃었는지 알려주시고 그 갈림길은 현지인도 주의하지 않으면 찾기 힘들다고 귀뜸해주셨다. 원래 계획대로 개인산에서 모래소 유원지로 나오는 길은 잔차타기에는 좀 그래도 경사나 험하기 면에서 오늘 길보다는 훨씬 더 수월하다고..... 그리고 오늘 온 그 길로 (집에 돌아와서 다시 지도를 보니 침석봉에서 꺽어져 기리내골 근처로 내려온 곳 같다) 잔차를 끌고 내려왔다는 건, 그야말로 목숨을 건 짓이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겨울에 오면 자신이 에스코트해서 구룡덕봉에서 주억봉 깃대봉을 거쳐 현리쪽으로 내려가는 길로 같이 가보자고.... 온바이크는 예의상 아, 그래주시면 환상이죠라고 말하고 일행의 눈치를 살핀다. 모두들 애써 외면하고 묵묵히 밥만 드시고 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 숸의 독수리 삼형제는 방태산을 탐험하고 돌아왔심다. ^^ 모두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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