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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령 여행기

........2001.11.27 03:04조회 수 524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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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왈바 식구분들 모두 평안하신지요
정말 오랜만에 들어와 보네요
모두들 여전히 행복하게 자전거 위의 인생을 달리고 계시는 것 같아
제 마음도 흐뭇합니다

아래 기행문은 사실...기행문이라기 보단 戀書 에 가까운 것이라서 보여드리기가 좀 쑥쓰럽긴 합니다만... 그래봤자 누가 누군지 어떻게 알간? 하는 맘으로 옮깁니다 이런 종류의 글 특성상 감정과잉 및 낯 간지러운 어투가 빈번함에 대해 심심히 사과드립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

“저거 뭐요?”
‘폭탄요’라고 할까하다 –911 사태이후 주변사람들이 한동안 폭탄 증후군에 걸리는 바람에 문득 생각남- 이른 새벽에 낫 살 잡순 분 놀래킨다고 뭐라할까봐 순순히
“자전건데요”
“어허, 난 행글라이던 줄 알았네. 내 동서가 그거 하거든. 좋은 건가 보네?”
긁적긁적.
“사십만원밖에 안 해요 (이거 국민스포츠인데…)”
“뭐? 자전거가 무어 그리 비싸누?”
자전거 싣고 택시 타면 항상 기사 아저씨들에게 묻는 이야기. 기사 아저씨 아는 사람 중에 자전거 타는 사람 있으면 그 사람 사생활 얘기 하고 그거라도 없으면 자기 옛날 옛적 강원도 놀러간 얘기를 하다 보면 시외버스 터미널에 금새 닿아요. 와, 오늘은 진짜 미친 듯이 밟는다. 20분만에 오다니. 덕분에 정류장에서 반바지 차림으로 30분 넘게 종종거리며 떨어야 했지요.

장거리 버스를 기다릴 때, 예전까지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두근거렸나 봐요. 혹 아가씨가 앉을까, 어떤 아가씨가 앉을까, 어떻게 말을 붙여 볼까나. 하지만 요즘은 그저 나처럼 빼빼 마른 사람이면 젤 좋겄다 하는 맘 뿐이예요. 가벼운 설렘 그리고 이번 여행의 화두 한 가지 맘 깊숙이 안고 양양행 첫 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카스텔라와 우유를 아침삼아 꾸역꾸역 뱃 속에 집어넣고 이제 막 동 터오는 서울의 새벽을, 숨 막힐 듯 자욱한 한강 물안개의 장관을 혹 기억에서 지워질까 꼭꼭 눈 속에 담아 둡니다.

친구, 이제 어둠이 깔리고 하루가 지고 있어 / 하지만, 넌 그 전에 어둠을 만났었지 / 네가 지금 혼자인 걸 알아 / 앞으로 나아간다는 게 힘들다는 걸 알아 / 친구, 넌 알지 못하는 길에 서 있지 / 하지만, 내가 너와 함께 집에 갈거야 / 네게 기꺼이 내 손을 빌려줄게 / 하지만 그 슬픔은 언제나 너의 것이야 / 하나 그리고 또 하나 / 그리움과 노여움으로 / 모든 것을 잃고, 또 모든 것을 얻지 / 내가 네 곁에 서 있을게 / 하지만 결국 / 삶에서 너는 혼자이지 / 삶에서 우린 혼자이지…

- En Og En, Silie의 노래 中

돌이켜 보니 여행 갔다가 돌아와서 기행문을 쓰게 된건 여러가지 동기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행의 쓸쓸함과 고즈넉함이 다시 못견디게 그리울 때, 다시 여행을 떠난다고 씻겨지지 않을 –똑 같은 여행은 있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일단 글을 적게 되지만, 또 다른 욕구가 충만해 있지 않다면 꼬박 며칠을 소모하는 그 성가시고 어려운 짓을 다 끝낼 수가 없었을 거예요.

작성된 기행문은 대개 특정한 목적을 위해 봉사하곤 했는데, 그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 글을 읽고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을 알아 주었으면, 그가 나를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보다 더 좋아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었어요. 이런 시도는 의도한 대로 되지 않은 적이 종종 있긴 했지만 , 고교 시절 첫사랑을 열병을 앓을 땐 촉촉하고 멋들어진 기행문을 연인께 바치기 위한 목적에 불타 올라 여행을 갔던 적도 많았어요. 한번은 중 3때 도 백일장 나간다구 마산에 있는 어느 여관에 묵으면서 그 당시 열렬히 흠모하던 우리반 반장에게 정말 멜랑꼴릭한 기행문 겸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당사자는 무반응에 가까운 편이었던 반면 –몇 년 후에 걔를 통해 들은 얘긴데- 반장애 대신, 걔 어머니가 -편지를 훔쳐 보곤- 나한테 반했다더군요. 

전날 네시간 밖에 못 잔 터라 한참을 버스에서 잤나 봐요.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아저씨가 조심스럽게 깨우는 바람에 잠을 깨게 됐는데 아, 글쎄, 제 다리 밑에 있어야될 배낭이 승객들의 안스러운 눈길 속에서 버스 복도를 뒹굴고 있더군요. 배낭을 수습하고, 그나저나 여기가 어데여 하고 창밖을 내다 봤더니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꼬불꼬불 고갯길 모퉁이를 지나고 오를 때마다 조금씩 색깔이 짙어지는, 명동 밤거리보다 아아니 J J 마호니 –내 기억 속에서 가장 휘황찬란했던 곳!- 보다 백배는 신비스러운 단풍이 눈부신 햇살을 머금고 계곡계곡 만개해 있었어요.

“야, 참 좋다.”
“올핸, 한계령이 정말 곱게 물들었네.”

간간이 장탄식을 내뱉으며 버스 승객들 모두 감상하기에 여념이 없더군요.

양양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오전 10시 30분. 정확히 4시간만에 도착했어요. 터미널이 바다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았는지 바다 내음이 물씬 풍겨와요. 긴팔 티 벗구 반팔로 갈아입구, 장갑 끼구, 자전거 꺼내 조립을 하는데 오랜만에 자전거를 만지다 보니 뒷바퀴가 잘 안 끼어져서 낑낑대고 있으려니까 옆에서 신기한 듯 물끄러미 쳐다보던 택시 기사 아저씨들이 자기네들이 끼워 주겠노라고 자전거에 우르르! 몰려 들었습니다. 우격다짐으로 바퀴를 밀어넣으려고 하는 통에 체인이 조금 휘어진 것을 빼곤 무사히 조립 완성. 근처 식당에 들러 이른 점심을 먹었습니다.

제작년인가 오색에서 내려서 내면으로 가는 삼거리로 가려다 어구야 높은 고개 때문에 고생한 거에 비해서는 이번 길은 룰루랄라 상당히 평탄한 길입니다. 출발 30분만에 삼거리를 지나 첨 맞닥뜨리는 언덕과 씨름하기 시작했습니다. 300미터가 넘는 긴 오르막이지만 아직 싱싱한 체력을 바탕으로 쉬지 않고 단숨에 넘어갑니다. 헥! 헥! 이윽고 나타나는 깊고 긴 내리막.
아 조타!
골이 깊으면 산이 높듯이, 혹은 조삼모사이긴 하지만 바이커들이 제일 행복할 때가 이런 때예요.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훨씬 길고 가파를 때. 시속 5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달릴 땐 자전거 바퀴가 도로와 접지하면서 쉭!쉭! 하는 생경스런 소리가 나는데 바이커가 속도감의 피안에 도달할 때가 된 거예요.

한시 반 까지 미천골 휴양림까지 도착할 요량으로 쉼없이 바퀴를 굴립니다. 아… 그러나… 이놈의 엉덩이. 오금이 저려올 정도로 아프군요. 자전거를 자주 타야 엉덩이가 안장의 굴곡에 맞게 어느정도 변형? 또는 적응이 되는데, 근 삼개월여 안장에 올라가 본 적이 없으니 원. 에이, 쉬엄쉬엄, 찬찬히 가자구요!

큰 계류를 옆에 끼고 이 마을 사람들은 벼와 깨, 배추, 무우, 깻잎 등을 자그맣게 일구고 살고 있네요. 깨밭이 많은지 향긋한 깨 냄새가 자전거를 졸졸 따라옵니다. 삼거리 얼마 안 지나 송천이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은 송천떡이라는 찰지고 쫀득쫀득한 명물로 유명하대요. 다음 마을은 서림, 기억 나세요? 자전거 여행기 1탄에서 세차고 맑은 바람이 불던 조칩령. 조금 더 가다보니 그 때 아침요기로 라면을 먹었던 휴게소. 짭짭, 참 맛있었는데. 날 잠시 설레게 했던 아주머니는 여전히 이쁜 모습으로 여행객들의 맘을 아리게 하는지. 그 담 마을은 안진 쑥으로 유명한 동네라는데 두렁두렁 마다 가을 쑥이 번져있고 온 마을이 매캐한 쑥 내음으로 가득해요.

자전거 안장 위에서 바라다 보는 세상은 아무래도 좀 다르지요.

네 번의 언덕길과 내리막을 거쳐 한 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미천골 휴양림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예정보단 조금 빨리 온 셈이네요. 오늘 중으로 1060미터 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생각이 조금 마음을 조급하게 했던 것 같네요. 넘어야 할 고개 주위의 산자락이 구름 속으로 어슴푸레하게 비치기 시작해요. 얼마나 아스라히 보이는지 마치 노 저어 건너야 할, 풍랑이는 바다 건너 작은 섬 같아요. 여기서부터는 자전거로 첨 가는 길.

길이 조금씩 경사가 지기 시작하면서 자전거를 멈추고 쉬어야 하는 시간이 덩달아 길어집니다. 저기 저기 앞에 보이는 급회전 표지판 까지 쉬지 않고 가야지 맘 먹구 고개 숙이고 미친 듯이 페달을 밟다가, 정강이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에, 이젠 다 왔을 거야 하는 조급한 맘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다 보면 표지판은 아직 먼 곳에서 손짓하고 있어요.

계곡 건너 숲이 한가득 눈에 담기는 곳쯤 해서 맘 먹구 퍼질러 앉았습니다. 물 한 모금 담배 한 모금 먹고 스쳐가는 차가운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식혀 주기를 기다려요. 스산함. 하늘은 아까 전부터 비가 금새라도 내릴 듯이 무뚝뚝하고, 차가 다니는 길이라는 게 무색할 만큼 앉아있는 내내 지나가는 차도 없네요. 쓸어가는 이 없는 길 위엔 낙엽들만 무성히 길 위를 쏜살같이 달리고, 빛 한 점 없는 새벽에 소백산을 오르다 맞아들이는 긴 정적처럼 세상의 시간이 멈춘 듯, 어지러운 마음만 하늘에 너울거려요…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이면
나는 너에게로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고정희

부질없음이 너무도 명확함에도, 저 고개 정상에 다다르면 내 마음이 가야할 길을 알려 줄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가 나를 계속 길을 따라 가게 합니다. 드디어 비가 내리기 시작해요!   

본격적인 고갯길로 접어드니 이젠 자전거를 타는 시간보다 걷는 시간이 더 많아졌어요. 햇빛이 비쳤으면 퍽이나 고왔을 단풍도 빗 속엔 그저 처연하기만 하군요. 근데 이것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어요. 도로가 새파랗게 비에 젖어 안개에 싸여 신비롭기만 한 단풍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네요. 그 풍경속에 홀로 반짝반짝 빛나는 자전거.

올라가야 할 길을 대략 10킬로미터쯤 잡으면 걷는대두 시속 5킬로미터는 가니까 두시간이면 얼쑤 정상에 올라설 것 같더니, 벌써 한시간 반을 올랐는데도 아직 반도 못 온 것 같아요. 어휴, 큰일 났다. 가방에는 달랑 사과 네쪽 밖에 없는데 벌써 배가 고파오니. 비가 조금 덜 들이칠만한 나무 밑둥을 찾아 앉아 사과를 베어 먹고, 착 가라앉은 기분으로 멍하니 있다, 울컥 하는 마음에 무턱대고 그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사실은… 좋은 말 멋있는 말 한마디도 못하구 머쓱하게 전화를 끊게 되어서 전화 걸기 전보다 기분이 더더욱 가라앉아 있었어요. 그랬기에… 전화를 다시 받았을 때 제 목소리가 그렇게 들떴나 봐요… 방금 전까지 끙끙거리더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라구 생각하시진 않았는지…

결과야 어쨌든

그치의 전화 한 통이 칙칙하기만 했던 노정을 밝고 화사한 색깔로 덧칠해 버렸어요!

하지만, 정말 힘든 길이었지요.

간혹 차들이 지나치며 경적을 울리기도 하고 박수를 치기도 하고 그래요. 괜히 기분이 으쓱해져서 답례로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하고 주먹 불끈 쥔 채로 팔을 쭉 뻗어 개 폼(?) 잡아보기도 하구, 나중에는 저 모퉁이에서 차 오는 소리 들리면 자전거 밀다가도 얼른 자전거에 올라 타 죽을 똥 살 똥 달리는 척 하기도 하구… 그 짓 두 세번 하다가 진짜 맛 가는 줄 알았어요… 얼른 집어 치우고 말았죠.

어느새 비가 그치고 먼 북쪽으로부터 조금씩 파란 하늘이 보이며 날씨가 개이고 있어요. 아마도 정상쯤에 다다르면 아쉬운대로 저녁햇살이 비추는 산야의 풍경을 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네요. 그나저나 에고고 죽겠네, 자전거 미느라 허리도 쑤시고 장딴지도 얼얼하고 발도 따끔따끔하고… 하지만 그럴수록 정말 도전할 만한 고개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길… 정말 좋네요… 한참동안을 오르는 사이에는 한 발자국도 더 못갈 것 같기만 한데, 잠깐이라도 쉬고 나면 또 얼마간의 힘과 오기가 몸을 채워요. 

가끔씩 지나가는 차 소리도 끊기고 온 골짜기가 괴괴한데 어느 봉우리에선가 까악까악 괴이한 새 울음소리만 메아리가 되어 하늘로 퍼져 나갑니다. 갑자기 이는 호승심에 가던 길을 멈추고 보고 싶은 사람들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봅니다.

“어무이~~”
“바야~ 바~”
“X X 야~~” 

네시 반 쯤에야 정상이 목전에 다다른 곳에 도착했습니다. 갈 길은 아직 멀고 배 고픈 상태는 이미 지나 무감각하고 날은 이제 서서히 기울어 가지만, 보고 가야할 것이 있었어요. 여기가 산 아래 풍광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인 데다 –막상 정상에서는 수풀에 가려 잘 안 보여요- 조금만 기다리면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비쳐 수년 이래 가장 아름답다는 단풍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되거든요. 절벽 가장자리, 평평한 바위에 웅크리고 앉아 오실오실 떨면서 한 10분쯤 기다렸을까.

저것 봐, 저것 봐

가녀리고 따스한 초저녁 햇살이 산등성이 계곡 하나하나를 먹어들어 가며, 한 꺼풀 한 꺼풀씩 형형색색의 단풍들이 다시 피어오르는, 이 세상의 풍광이 아닌 듯한 광경을 숨 죽인 채 바라보았지요. 수십개의 등성이를 넘어 온 햇살은 나에게 다가와 손가락을 간지르더니 팔뚝과 얼굴까지 올라와 이제껏 느낀 적 없는 따뜻한 온기로 나를 감싸안았어요. 

그때 보았던 풍경을 차마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네요. 감격스러움에 눈물이 그렁그렁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보여 줄 수 있는 모든 광경을 한 지친 여행객에게 허락하였다는 것에 대해 누군가에게라도 경배하고픈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마지막 십분은 젖 먹던 힘을 다해 페달을 밟고 올랐습니다. 방금 전의 쇼크가 너무 강해 혹은 아사 직전의 상태라 구룡령 정상에서 아무 느낌도 감회도 없었죠. 그대로 정상 뒤편 휴게소로 돌진함.

휴게소 기둥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있는데 건물 안에 있던 점원 아가씨 둘이서 막 신기해 하면서 날 쳐다보는 게 느껴지더군요. 내리막길 오면서 숨은 이미 다 골랐지만, 숨이 턱까지 찬 듯 헉헉 대는 –나 이 고개 자전거 타고 올라온 거야! 어때, 멋지지? 폼나지?- 시늉을 나도 모르게 하고 나서 바로 자학을 했지요. 어휴, 머릿속에 도대체 뭐가 들었길래… 여자 앞에서 있으면 이렇게 유치한 짓만 골라 하는 지 몰라. 

잔치국수를 한 입에 꿀꺽 해 버리고, 서둘러 다운힐 준비를 합니다. 오르막길이 험하고 긴 만큼 내려가는 길도 만만치가 않거든요. 긴 옷을 꺼내 받쳐 입고, 장갑도 긴 걸로 바꿔 끼고, 낼 아침 먹을 요량으로 생감자 구이 한봉지 사서 쑤셔 넣고.

얼마나 빨리 내려가나 보자 싶어 메터기를 보니, 10km를 내려오는데 12분 가량 걸렸더군요. 평균 시속 50km… 오르는데 네시간 걸렸는데… 쩝. 한마디로 미친 짓이었어요. 속력 안 줄이고 가다 급회전 길에서 반대편 차선으로 튀어 나갔다 들어온 게 세번, 도로 움푹 파인데 지나가다 자전거와 함께 점프하며 저세상으로 갈 뻔 한 적도 있구… 얼음 구덩이 속에 있다 나온 듯 몸이 꽝꽝 언 채로 내려와서 –다운힐 할 때 체감온도 영하 10도쯤? 다음번엔 오토바이 레이서들이 입는 가죽점퍼와 바지를 입고 와야 겠더군요- 그래두 좋은 민박집 찾겠다는 신념으로 30분 넘게 어스름 짙은 마을과 마을 사이를 콧물을 질질 흘리며 헤메다 6시쯤 겨우 민박집 입성에 성공.

하얀 페인트 칠을 한 귀여운 2층짜리 목조건물인데, 주인 아주머니는 혼자 2층에서 사시는 모양이예요. 집 앞으로는 담장없이 잔디랑 바위랑 맵시있게 꾸며져 있고, 뒤쪽 계곡 옆에는 테라스를 근사하게 놓았더군요. 아, 근데 이 아주머니 나에게 얼마나 친절한지 굉장히 부담스러울 정도였어요. 샤워 하고 발가벗은 채로 방에서 머리 말리고 있는데 갑자기 문 열고 들어오시는 바람에 또 얼마나 당황했는지. 산에서 직접 캔 느타리버섯을 넣은 찌개라고, 몸에 좋으니까 많이 먹으라는 말씀이 부담이 돼서 다라이 크기 만한 찌개 냄비에서 그거 일일이 건져 먹느라 딴 반찬은 제대로 먹지도 못했죠.

밥 먹구 뜨뜻한 방바닥에 누워 쑤신 허리를 지지며 위대한 개츠비를 읽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나 봅니다. 어이쿠, 하면서 일어나 보니 저녁 아홉시쯤? 내쳐 그 책을 독파한 다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다가 나와서 계곡 주변을 하릴없이 거닐기도 하다 11시 반쯤 억지로 잠을 청했어요. 왜 무라카미 하루키가 상실의 시대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어 개츠비를 찬양했는지 이해가 되더군요. 하루키는 주인공의 전범이 될 만한 스타일을 그 책을 통해서 찾았던 것 같습니다. 젊은.. 이야 여러 번 봤던 거니 감흥이야 그저 그렇구… 어쨌든 제 고민거리는 그대로 가지고 서울로 돌아가야 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이 여행이 그것을 더욱 키우는 행위가 아닐런지도 모르겠네요…

1박 2일의 여행은 대개 첫날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다 있는 거 아시죠? 둘쨋날은 아침 일찍 집을 나와 면 사무소까지 한시간 반쯤 자전거를 타고 나와 버스를 타고 고개를 넘어 읍내로 나온 다음,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첫날이 너무 드라마틱해서 더 이상의 여행에 대한 기대가 없기도 했구, 엉덩이도 시리구… 끈기가 없으면 항상 용두사미가 된다니깐요!

재미없게 읽으셨어도, 넘 감상적이라 밸이 꼴려도 하는 수 없습니다. 속편은 없을테니깐. 정말이지 이런 식의 기행문은 더는 못쓸 것 같네요. 그 밥에 그 나물… 그래서 다음번부턴 최근 글들의 경향에 맞춰 좀 더 드라마틱하면서도 dry 한 여행을 해 볼 생각도 있습니다.

가령 절벽에서 굴러떨어지는 여자를 극적으로 구출하지만 연락처를 남기지 않은 채 떠난다든지, 민박집 아주머니와 첫눈에 사랑에 빠지나 기성세대의 도덕관념을 넘지 못하고 눈물을 삼키며 암 말 못하고 다음날 헤어진다든지… 왝왝

넘 멋있는 xxx님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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