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11일)인 일요일 아침 역시 뷔페 식당서 아침을 든든히 먹고 9시께 체크아웃하고는 `그 복잡한 전철을 제대로 잘 타야 무사히 귀국 하는 날`이란 점에서 약간 긴장된 마음으로 호텔을 나섰다.
실은 인천서 일본의 이 호텔까지 동행해온 가이드양이 `필요한 분이 있으면 가이드도 하겠다.`며 이 곳에 그대로 머물고 있으면서 전날 밤늦게 전화로 나리 따 공항까지 셔틀버스를 타겠느냐고 물어 왔었다.
처음 나리 따 공항서 호텔까지 오는 셔틀버스 속에서 가이드 양이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도쿄지리에 좀 불안해하던 집사람이 `편한 것이 좋지 않겠느냐/`며 반승낙을 했었기 때문인듯.
허나 자유여행이라 해서 가이드 비를 전혀 예상치 못했다가 그 버스 속에서 약간의 가이드를 받아 선지 `버스기사를 위한 팁`이라는 핑계로 30여명이 1천엔 씩 갹출 당한 바 있어 귀로의 버스요금 2천4백엔 속에도 이런 팁이 포함된 것 같아 거부감이 생긴데다 전철을 이용하면 두 사람의 교통비가 2만원이상 절약된다는 점외에도 앞으로의 완전 개인여행을 위해서는 반드시 체험해 봐야 한다는 점을 들어 집사람을 설득, 원래의 계획대로 1280엔 짜리 전철을 타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이날의 예정 코스는 황궁 서편으로 북상해 스포츠의류 가게가 많다는 간다오가와초 거리를 구경하고는 되돌아 내려와 도쿄 역에서 나리 따 행 전철을 타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간다오가와초까지 달려 가보니 이 일대거리는 일본특유의 계절적인 축제거리로 변해 있었다. 일요일이기도 해선지 가게들은 거의 철시한 채 유가다 차림의 주민 1백여명이 마치 소형 정자모양의 가마를 메고 무슨 구호 같은 소리를 지르는 가마꾼을 따라 행진하고 있었다.
뒤에 알고 본즉 이런 축제 행진 팀은 여러 팀이어서 이 일대의 거리 곳곳서 길을 막아 자동차의 왕래도 차단되고 있었다.
팀별 가마 모양도 각각이지만 가마 꾼도 성인 팀, 10대 청소년 팀, 심지어 초등생 팀으로 나뉘어 있었다.
팀 외곽에서 음료수공급등 서빙 일을 맡고 있던 여인들은 바지류 위에 긴 유가다 차림이나 남자는 거의 모두가 짧은 상의에 하의는 생략, 아랫도리는 딱 고환만 가린, 소위 `훈도시`만 두른 차림이었고 남미의 라밤바 춤에서처럼 딱 붙어 서서 반보씩 행진하는, 청소년 가마 꾼들 사이에 가냘픈 여학생도 끼워 져 있었다.
이 통에 쇼핑대신 이 진기한 축제 촬영에 열이 올라 행렬 속으로 뛰어들기도 하자 집사람은 비행기시간에 늦을까 봐 조바심이 났던지 `빨리 돌아가자.`는 재촉.
마음이 급해 정지신호중인 횡단보도를 마구 건너자 교통순경이 제지하기위해 나를 붙잡으려다가 손에 카메라를 든 것을 보고는 못 본척 해버려 역시 이런 것은 한국과 마찬가지의 `인지상정이 있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집사람 등쌀에 사진도 제대로 다 못 찍고 발길을 돌려 도쿄 역으로 향했고 중도에 축제 행렬을 뚫고 가다보니 길이 헷갈려 10분 이상 지체되었으나 전철용 고가 밑을 따라 남하, 두 잔차를 가방에 넣는 시간 30분, 전철대기 시간 30분, 나리 따까지의 소요시간 1시간 반등을 계산해서도 3시 반 비행기까지 무려 2시간 반이나 여유가 있는, 10시 반께 도쿄 역에 안착.
잔차를 끈 채로 곧바로 첫날의 답사대로 지하 역 매표 창구 앞으로 가서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면서 끝 다리 동전까지 포함된 1280엔씩 두 번을 내밀고는 `가이쇼크 에어포트 나리 타 터미널 투`라고 말하자 역원은 가운데 구멍이 있는 동전 두 개를 되돌려주면서 뭐라 하는데 아무래도 50엔짜리로 알고 내민 동전 두 개가 5원짜리라는 것 같았다.
재빨리 1백 원짜리 동전을 하나 더 꺼내 건네니 `오케이`라며 컴퓨터로 두 장의 티켓을 발부해준다.
이제 다음 문제는 개찰구 통과로 공항 역에서 혹시 좀 먼 거리를 무거운 잔차 가방을 메고 다니게 되는 경우는 애를 먹게 된다는 점을 고려, 가능한 한 그대로 끌고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 그리고 또 서울서는 흔히 그대로 잔차를 싣기도 하는 점을 상기, 연습삼아 그대로 통과 해 보기로 하고 개찰구로 들어가려 하자 역무원이 `빠쿠..빠쿠`란다.
순간 잔차를 무조건 전철에 못 싣게 하는 것으로 알고 심히 당혹스러웠다. 인터넷 등등서 도쿄 전철에 잔차 승차 여부를 확인 해보지 못한 상황이라서 사실 이에 대한 확신이 없던 터라 잘못 돼 공항까지 2만 엔 가까운 택시를 대절한다는 것은 가상만 해도 아찔한 일.
이래서 난감한 표정으로 서있자 역원은 또 다시 `빠쿠..빠쿠..`라며 이번에는 오른 손 주먹을 쥐며 머리보다 높이 올려. 이때서야 `빠쿠`가 거절이 아닌 `백`즉 가방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
일본사람 특유의 영어 발음은 엉망이어서 알아듣기가 힘들다는 걸 비로서 실감한 셈이다.
바로 초소 옆 공간에서 진땀을 빼며 두 잔차를 뒤 드레일러까지 분해해 준비해 간 끈으로 후레임에 붙들어 매고는 아예 항공기탑승에 대비, 타이어의 공기 압을 대폭 줄여 가방에 넣어 메고는 `이렇게 힘들게 고생시키느냐?`는 항의성 표정을 지으며 자동 개찰구를 통과하자 그 역원은 `미안하고 안쓰럽다.`는 표정의 미소를 보내준다.
집사람과 둘이 다 배낭을 메고서도 내 경우는 오른쪽 어깨에 11.5K 무게의 잔차 가방을 메고서 한발 앞 선 집사람이 오른 손으로 든, 그의 12.5K 무게의 잔차를 왼 손으로 함께 들어 줘야 하는 묘한 행렬이 돼 또 다시 `가이쇼크`를 타는 프랫홈으로 향하는 지하도를 물어 보며 계단으로 프랫홈에 내려가자 양쪽 철길에 같은 북행 전철이 동시에 도착, 분주한 승객들이 서로 엇갈리며 열차를 갈아타느라고 복잡해 또 당혹스러울 지경.
다행스럽게도 30대 후반의 한 청년이 계단을 등지고 오른쪽 프랫홈을 가리키고는 소매를 걷어 시계를 보이기까지 하며 다음 차가 11시10분발임을 알려 주는. 작년 12월 북경에서 시험해 봤던 나보다 훨씬 더 능숙한 그의 보디 랭귀지다.
30분 간격 운행의 `가이쇼크`를 15분 기다리자 천장에 달린 전광판에 가이쇼크란 뜻의 `快速..그리고 일본글이 있는`행이란 문자와 일본말 안내가 나오며 좀 전에 출발한, 우리나라의 무궁화호 비슷해 큰 짐 싣기가 좀 불편할 듯한 익스프레스와는 달리, 마치 서울의 전철과 거의 같은 열차가 도착, 양쪽으로 열리는 넓은 문안으로 쉽게 두 잔차 가방을 싣자 어느새 지상으로 달린다.
두 잔차 가방을 출입문 앞에 모로 세워 놓은 채 앉을 자리가 없어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데도 주로 청소년 등 젊은이가 많은 승객들이고 또 옷차림도 우리나라와 비슷한데도 양보하려는 눈치조차 보이는 녀석도 없어 역시 이국이란 느낌.
주택가의 역을 4~5개 지나서야 좌석이 나 앉아서도 집사람은 아기자기한 차창 밖 주택구경에 계속 여념이 없었으나 난 졸고 있었는데 맞은 편 좌석에 우리나라서 흔히 보는, 일본 만화의 여주인공을 꼭 그대로 빼 닮은, 깜찍하게 예쁜 소녀도 앉아 있다는것 외에는 그 양쪽 옆에는 우리 의상과 별 다름 없는, 노처녀 풍의 여인들이 앉아 졸고 있는 데다 전철내부도 우리와 비슷해서 졸다가 깨어나면 서울의 전철로 착각이 될 정고.
종점까지 두 역을 앞둔, 나리 따 터미널 2역이 가까워 질 무렵 재일 동포 50대부부가 앞자리에 앉아 아는 척을 했는데 그들은 `아주 보기가 좋다.`며 부러워했지만 골치 아픈 일이 생겨 자위 차 떠난 잔차 여행이기도 해 몰래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나리 따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다행히 얼마 걷지 않아 공항지역으로 들어 갔고 에스카레이트로 1층서 3층 출국대합실로 올라가 가트에 잔차 가방을 싣고는 충분한 여유시간을 누리느라고 모찌등으로 간식을 먹으며 한동안 쉬고 난뒤 아시아나 일본인 여직원의 잔차 타이어 공기압 조정 여부 등의 똘똘한 질문을 받고야 비행기에 올라 늦은 점심으로 나온 기내식을 즐기면서 비로소 확실하고 무사한 여행의 끝마침을 실감했다.
(계속-<에필로그>는 주중께나 되어야 탈고 할 듯함. 본격적인 사진은 개인 홈피에 별도 페이지로 추가해 넣을때 첨부하겠음. 그 때를 대비, 맨위의 홈피주소 화면으로 바꿔 북마크를 해 두시면 잊지 않을 것임. 위의 사진은 가이쇼크 에어포트 나리따 전철안의 집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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