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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밤(Night)을 먹다. <황혼에서 새벽까지 그리고...> (1)

ARAGORN2004.08.15 16:15조회 수 1422추천 수 3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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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밤(Night)을 먹다. <황혼에서 새벽까지 그리고...> (1)



편의상 경어는 생략하겠으니 여러분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저녁 8시...

야간일주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걱정이 많이 되었는데 해가 완전히 저물지 않은 관계로

어느 정도까지의 거리를 가로등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어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참고로 나는 밤눈이 좀 어두운 편이다.

그래서 야간 라이딩 때는 사고를 우려해 다른 시간대 보다 더욱 조심스럽게 라이딩을 한다.



저녁은 간단하게 김밥으로 때우고 이마트에서 약간의 먹거리를 준비한 뒤 일주를 시작했다.

작열하던 태양의 위세도 한풀 꺾이어 어느덧 서쪽 저편으로 쉬러 가고

붉은 빛으로 찬란한 저녁노을이 기기묘묘한 구름들을 배경 삼아 세상을 아름답게 비춰 주고 있었다.

제주를 여행했던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의 구름은 정말 아름답다"라고 한결같이 말하는데 과연 그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맑은 하늘에 하얀 구름들...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도 영혼까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저녁노을에 비친 해안가의 풍경은 정말 근사했다.

검은색의 용암들과 넓게 펼쳐진 붉은 빛의 바다 그리고 저 멀리 수평선 위의 어선들...

이것들이 조화롭게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해 내는데...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 있으랴~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적 여유만 있었으면 어느 까페의 창가에 앉아서 노을진 남국의 정취를 마음껏 누렸을텐데... 정말 아쉬운 순간이었다.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고...



라이딩 속도는 안전모드로 정했다.

장거리를 달려야 하므로 체력비축도 하고 소화도 시킬겸 초반은 천천히 안전에 신경을 쓰면서 달렸다.

속도를 내며 지나가는 승용차들의 위협속에서도 노을이 있는 동안은 비교적 안전하게 달릴 수 있었다.



밤 9시 무렵...

이호해수욕장을 지나 애월로 향하는데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길가에 늘어선 식당의 간판들이 하나 둘씩 빛을 발하고 아름답게만 보였던 바닷가의 풍경들이 암흑과 함께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갔다.

늦은 시간이라 하이킹하는 사람들을 구경할 수 없었고 간혹 동네 사람들이 철티비를 타고 지나다니는 모습만 눈에 띌 뿐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사람은 오직 나 한사람뿐인 것이다.



중간중간 가로등의 도움을 받으며 달리긴 했지만 계속 이어지지 않아서 나 자신의 판단과 순발력에 의지해야만 했다.

사방이 암흑으로 변하니까 멀리서 다가오는 차량의 엔진 소리가 상당히 위협적으로 들렸다.

마치 알 수 없는 공포가 나를 엄습해 오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중간에 공사하는 곳이 많아서 고속으로 달리거나 한눈을 팔게 되면

파놓은 구덩이에 빠지거나 옆 도랑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공사중이거나 갓길이 재대로 조성되어 있지 않은 도로에선

뒤에서 차가 온다 싶으면 최대한 갓길로 붙어서 멈춘 다음 차를 보내고 다시 출발하는 방법으로 라이딩을 했다.

덕분에 시간은 좀 지체되었지만 그래도 안전이 제일 중요하니까...



밤 10시...

한림 3킬로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한림에 도착하면 쭈쭈바를 사먹어야지~'

열대야로 전국이 무더운 여름밤이었지만 달리고 있으니까 오히려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풀밭에서 나는 벌레들의 소리,도랑에서 나는 개구리들의 합창,늘어선 가로수들의 상큼한 냄새가 시원함을 더해 주는 것 같았다.

뜨거운 한낮을 피해서 라이딩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한림이다.

슈퍼에서 쭈쭈바를 하나 사고 의자에 앉아서 맛있게 빨고 있는데 뭔가가 따끔 거린다.

아~된장! 이놈의 모기들이 물 건너온 명품(?)인걸 알았을까? ㅎㅎㅎ

어느새 왼쪽 다리 2방,왼팔 1방을 물렸다. 으~ 내 아까운 혈~

용서할 수 없다! 부르르~~~

그러나 몸이 둔한 관계로 이내 포기하고 굶주린 모기들을 피해 다시 길을 재촉했다.

쭈쭈바를 쭈욱쭈욱 빨면서... 아~ 맛있다~



밤 11시...

출발부터 지금까지는 정신과 육체가 그렇게 나쁜 상태는 아니었다.

잠을 재대로 못자서 약간의 피곤함은 있었지만 평소에 트레이닝을 꾸준히한 상태라 크게 걱정될 것은 없었는데

11시로 접어드니 다리에 힘도 빠지고 약간의 졸음도 오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잠도 안자고 낮에 돌아다닌 여파가 이제 서서히 고통으로 나타나는것 같아서 약간 불안했다.

한림을 출발할때 까지도 괜찮았었는데...



타이어 소리만이 적막한 허공을 가르는 가운데 어둠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가로등도 없는 공사지역을 지날때 마다 극도의 긴장을 해야만 했다.

가끔씩 지나가는 차량들 외엔 주위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와 자전거 그리고 암흑천지를 약간 밝혀주는 외로운 달만 구름 사이를 오갈뿐...

이 순간에는 "고독을 씹는다"라는 말이 정말 실감이 났다.



밤 12시...

수월봉을 겨우 지나 인가도 없고 뭐라도 나올것 같은 그런 분위기의 적막한 도로를 고독을 씹으며 달렸다.

갑자기 피로가 몰리고 졸음이 쏟아져 길가의 버스정류장 벤치에서 잠시 누워 10분간 눈을 붙였다.

이 순간은 정말 꿀맛 같은 시간이었다.그러나 이것도 잠시...



쉬고 일어나니까 '어럽쇼? 이게 왠 날벼락인가?'

양 다리와 왼쪽 팔이 간질간질한게 퉁퉁 부어있는 것이 아닌가?

'으~아아아아악~~~'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무려 십여 군데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었다.

잠시 쉬는 동안 나는 제주 흡혈 모기들에게 한여름 밤의 만찬의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엉~엉~'



씩씩거리면서 벌레 물린데 바르는 약으로 물린 곳을 도배를 하고 서둘러 이 지옥 같은 장소를 떠났다.

정말 공포의 밤이 따로 없었다.

지금도 그때 물린 흔적이 남아있는데 솔직히 난 흡혈귀보다 이 모기들이 더 무섭다. -.-



모기에 물린 부위가 가려운 것이 자꾸만 나를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페달질하며 긁으며 힘겹게 나아가고 있는데 멀리서 지나가는 구름이 심상치 않게 보였다.

시커먼게 비라도 내릴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인가도 없는 곳에서 밤을 새는건 아닐까? 아~ 안돼! '

또다시 모기의 제물이 된다는건 생각만해도 끔찍스러운 일이었다.

'비가 안와야 할텐데...오더라도 일시적인 소나기에 그쳐야 할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달리는데 드디어 올것이 오고야 말았다.

하나 둘씩 내리는 빗방울이 나의 온몸과 잔차를 적시기 시작했다.

나는 비를 피할 장소가 나오길 기대하며 보다 빠른 속도로 페달을 밟았다.

'오~ 제발~~~ 비를 피할 수 있는 아무 곳이나 나와라~~~ 나와라~~~'

2-3분 여를 달리고 있는데 나의 처절한 외침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저 멀리서 뭔가가 보이는 것이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서너 채의 인가와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휴~ 다행이다.'



나는 거기서 준비해 두었던 연양갱을 먹으며 10여분간 비를 피했는데

기대했던 대로 비는 일시적인 소나기여서 천만다행이었다.

'피곤하고 졸리는데 비까지 맞고 달렸다면 얼마나 처량했을까...'


  
밤 1시 10분...

흡혈 모기에게 수십 군데를 유린당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소나기의 습격마저 피한 나는 1차 목적지인 대정(모슬포)에 도착했다.

대정에 도착하기전 '대정에서 잘까 말까'하고 많은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것이 아까워 '가는데 까지 가보자'고 마음먹고 계속 달렸다.


육체는 피로하고 졸린 상태였지만 모기에게 물린 양다리만은 쌩쌩하게 돌아가 주었다.

산방산을 뒤로하고 부터는 제법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

서귀포시가 가까워지니까 가로등들이 주욱 늘어선게 정말 반가웠다.

무엇보다 시야를 확보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중문 근처부터 서귀포까지 이어진 내리막길 덕분에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밤 2시...

달리다 보니 어느덧 중문이다.

그러나 그림의 떡인걸 어떡하랴.

밤도 늦고 갈 길이 바빠서 중문단지를 둘러보지 못한 것이 정말 아쉬웠다.

'다음엔 관광모드로 와야지...'



자전거와 일체가 되어 고요한 달 아래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야자수 사이를 지날 때는 정말 지상 낙원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달리는 내내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1악장의 선율을 떠올리며 서귀포의 야경을 만끽했다.

제주 일주 중 가장 좋았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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