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은 되서 술자리는 끊이지 않는데 술이나 진탕 마시면서 새해를 맞이하자니 뭔가 개운치 않고 한 살이라도 더먹기 전에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해보자 하고 고민하던 끝에 내린 결정이 일출을 보러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매일 자전거 타는게 일상이 되어버려서 심지어는 편의점에 갈때조차 자전거를 끌고 가는 나는 이미 심각한 자전거 중
독이었다. `그래, 기왕 보는 일출 남들 다 하는거처럼 기차나 자동차타고 가서 보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내힘으로 가서
봐야 진짜 의미가 있는거지...'까지 생각했을때쯤엔 마음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었다.
부랴부랴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지도를 보면서 코스를 정하고 크게 무리가 되지 않을 정도인 하루 150Km 내외의 주행거리로
숙박 계획을 짜다 보니 28일에 서울에서 출발하여 대전 1박, 29일 대구 1박, 30일 부산에서 1박 하고 무박으로 해안도로 따
라 주문진까지 올라가서 일출을 보고 주문진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서울로 돌아온다는 다소 황당한 계획이 잡혔다.
하루종일 지도보며 머리 굴려 짜낸 계획. 결국 하늘의
노함으로 끝까지 성사하지는 못했다.
2004/12/27 D-1
장거리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 뒤 푹 퓨식을 취하는 것이 정석이겠으나 수일간 자전거를 타고, 그것도 혼자서 떠난다는
것이 긴장되고 두려움 반, 설레임 반에 잠이 오질 않았다.
장거리를 뛰려면 무엇보다 첫째도 정비 둘째도 정비라는 생각 하에 체인 끊어서 세척하고 오일 새로 치고, 스프라켓도 번쩍
번쩍하게 닦고 크랭크 닦고 각종 레버 장력 점검하고 변속 체크하고 허브 유격 체크하고 그담엔 배낭을 이렇게도 싸봤다가
저렇게도 싸봤다가 이것 넣었다 저것 뺐다가 정신없이 헤메다가 새벽 3시에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장거리 여행이라면 짐받이를 달고 패니어를 하는것이 맞겠으나 사이클에 달만한 랙도 마땅치 않았고 패니어 가격도 만만치
않은 관계로 배낭을 이용하기로 했다.
번쩍번쩍 정비된 스프라켓. 이런 기본적인 정비상태가
라이딩시 드는 저항을 줄여 라이딩시 피로를 줄여준다.
체인에 낀 먼지를 제거하고 건식 오일을 발라 건조시
켰다. 하지만 추운 날씨에 건식 오일보다는 습식 오일이 도움이 되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추운날씨에 건식 오일은 생각
외로 소모가 심했다. 위에 보이는 것은 체인링크.
바닥에 늘어놓고 찍은 준비물 사진. 프레임이 절단나
는 사태만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태에 대처 가능하도록 짐을 꾸렸다. 여름이었다면 저것 반도 안들고가도 됐을텐
데.
막상 대전까지 가려니 두려움이 앞서는지라 아침 첫 전철로 병점까지 이동하는 얍실한 수를 써서 60여 킬로미터를 날로 먹으
려고 하였으나 하늘은 나의 편이 아니었다.
눈뜨니 8시, 출근시간이 한창인데 출근시간 전동차에 자전거를 싣기는 너무
눈치가 보였다. 까짓꺼 뭐 집에서부터 자전거 타고 출발하지 뭐. 해서 장안동부터 힘차게 페달질을 시작했다. 6킬로정도 나
가는 배낭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시속 25 이상 속도가 안난다. 하지만 이런일을 대비해서 여유롭게 계획을 짰으니 괜찮겠지.
그대로 강행군을 시작했다.
중랑천을 지나 강북 자전거 도로에 오르고 잠수교를 지나는 길에 유사 엠티비가 보이기에 가뿐
히 지나쳐주고 노량진을 지나서 1번국도에 올라탔다.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가다보니 의왕시 시계를 나타내는 표지판이 보였
고 여행가면 남는건 사진 뿐이라는 신조 하에 사진을 찍었다.
의왕을 통과하면서 한 컷. 이때까지만 해도 정말 여유
있었다. 가방 풀고 삼각대 펼쳐서 이리저리 각 잡아 보고 찍고 확인하고 다시 찍고... 하지만 이런 여유가 그렇게 오래 가지
는 못했다.
오산으로 가는 길은 활주로라서 길폭도 상당히 넓고 노면 상태도 비교적 고른 편이다. 갓길에서 샌드위치 파는 할아버지를
발견 샌드위치를 사먹는데 할아버지가 이것저것 물어보신다. 부산까지 가노라고 하니 국도에는 못같은게 많이 떨어져 있으니
조심하라고 하신다. 하지만 부산 갈때까지 결국 못은 발견하지 못했다.
오산에서 찍은 것으로 생각되는 사진. 사실은 어디서
찍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OTL 나이도 어린데 벌써 치매기가 있는것 같다. 도로도 한적하고 날씨도 별로 춥지 않고 해
서 순탄한 여행을 하게 될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열심히 페달질해서 평택으로 가는데 후배에게서 전화가 오기 시작한다. 6시에 대학로에 술마시러 오란다...ㅎ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술마시러 돌아가란 말인가? 살포시 즈려밟아주고 열심히 페달질을 하기 시작하니 평택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
평택에 들어서면서 한 컷. 이때쯤 뱃속에서는 혈당이
떨어지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기사식당에 들러 제육볶음을 먹고 에너지 보충해서 재출발 하
게된다.
평택에서 출발후 처음으로 식당에 들렀다. 자전거 끌고 식당 가니까 좋은점이 하나 있다. 반찬을 잘주고 대부분의 경우에 공
기밥을 공짜로 얻어먹을 수 있었다. 아마도 이계절에 배낭 메고 자전거 타는 인간이 정상으로 보이지는 않았을터 지금 생각
해보면 불쌍해서 그런게 아니었을까 싶다.
잠시후 한참 행정수도 후보지로 거론되던 연기군에 도착했다. 겨울이라 해가 짧아서 벌써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큰일이
다. 홍익대학교 표지판을 지나서 몇분이나 왔을까... 빨리 가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던 내눈앞에 멋진 야경이 보였다. 고려대
학교 정문인데 석조풍의 정문과 나트륨등의 색깔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아무리 시간이 급해도 여행이란게 사진이 없으면 단팥 빠진 붕어빵과 같은 법. 잠시 쉴겸 자전거에서 내려서 멋진 광경을 카
메라에 담아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결과는 변변치 않았다...^ ^;
조치원에서 본 고대 서창캠퍼스. 사진 기술이 후져서
그렇지 실제로는 석조건물같이 생긴 정문에 은은한 불빛이 비춰서 볼만했다. 날은 이미 어두워 졌지만 사나이 계획에 중도
포기란 있을 수 없기에 사진 찍고 서둘러 대전으로 향했다.
조치원부터 대전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주행거리가 150킬로를 넘겨가면서 점점 체력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가로
등 하나 없는 국도변에서 갓길로 헤드랜턴에 의지해 노면상황을 파악하면서 주행하는것은 고도의 정신집중을 요구하는 일이
라 심신의 피로는 극대화 되어갔다.
하지만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다. 물통의 물은 이미 꽁꽁 얼어붙었고 쵸코바는 차가운 사탕처럼 변해버린지 오래였다. 방법
은 하나뿐이다. 한시라도 빨리 기온이 더 떨어지기 전에 대전에 도착하는 길뿐이다.
잠시후 대전에 도착해서 찜질방을 찾기 위해 PC방에 들어가는데 난생 처음으로 자전거 못 들어가게 막는 PC방을 발견했다.
장사가 무지하게 잘 되나보다. 다른 PC방을 찾아 들어가려고 선글라스를 벗는데 갑자기 테가 부러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속
도계 마운트가 부러졌다. 강추위에는 플라스틱의 내구성도 영향을 받나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얼른 인터넷 검색으로 찜질방을 찾았다. 혹시나 해서 두군데를 정하고 가는 길을 간략히 메모한뒤 게임방에서 나왔다.
열심히 찜질방을 향해 페달질을 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 찜질방이 있어야 할 자리에 나이트 클럽이 있는것이 아닌가. 두
군데를 찾아보고 나온것이 다행이었다. 조금 먼곳에 있는 찜질방을 찾아가기로 했다. 찜질방에 도착하니 열두시였다.
찜질방 할아버지에게 자전거 여행중인데 자전거 도난이 걱정된다고 말하자 흔쾌히 카운터 옆자리를 내어주셨다. 어찌되었던
첫날 목적지까지 무사히 주행하였으므로 마음은 편했다. 하지만 원래 일정의 1/5정도밖에 온것이 아니기 때문에 긴장을 풀기
는 아직 이르다.
탈의실에서 웬 남자가 말을 건다. 찜질방 앞에서 날 봤단다. 어디서 출발했냐, 목적지가 어디냐, 혼자 가는거냐, 자전거는
어떤거냐 묻더니 다음까페같은데서 같이 갈사람을 구하지 그랬냔다... 이겨울에 내가 생각해도 미친짓인데 나같은 미친넘이
또있겠냐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저 허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냥 혼자 가는게 편하다고 했다.
일단 떨어진 체온을 올리기 위해 따뜻한 탕에 들어갔다가 이내 냉탕에 무릎을 식혔다. 장거리 일정에 무릎이 고장나면 안되
기 때문이다. 냉탕이 별로 차지 않다.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서 수면실로 향했다. 하지만 피로가 심한 탓인지 잠이
잘 오질 않는다. 동전넣고 하는 인터넷을 조금 하다가 새벽 세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당일 주행거리 177.27km
총 주행거리 177.27km
주행시간 9h 11m 26s
평균속력 19.3km/h
2004/12/29 D+1
늦게 잠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곱시쯤 잠이 깨었다. 전날 밤에 지독한 추위에 떨었던 탓일까 해가 떠있을때 목적지에 도
착해야만 한다는 일념이 지독한 피로에도 늦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다.
샤워를 한 후 찜질방에서 나와서 편의점엘 갔다. 선글라스를 고쳐야만 여행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속도계 마운트도 고쳐
야 했다. 편의점에서 순간접착제와 테이프를 샀다. 순간접착제로 선글라스 테와 속도계를 간이로 수리하고는 주위를 둘러보
니 만만한 식당이 없어 컵라면으로 아침을 때우고 포카리스웨트와 함께 오늘의 여정을 떠났다.
서울에만 언덕이 많은줄 알았는데 대전 시내도 만만치 않다. 완만한 업힐과 다운힐 구간이 이어지고 영동에 접어들자 저 멀
리 추풍령이 보이기 시작했다.
삼각대 꺼내놓고 노닥거리느라 지체할 시간따위는 없다. 오로지 해지기 전에 대구에 도착 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
예 사진을 찍지 않자니 나중에 크게 후회할것 같아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추풍령을 접어들면서 사진을 한 장 찍고 싶었지만 이
제는 삼각대 꺼내기조차 귀찮아져서 셀프를 찍기 시작했다. 하지만 셀프에는 큰 단점이 있었으니 어딘지 확인하기 용이하지
않다는 것.
추풍령을 오르면서 지치지 않도록 당분 공급과 수분 공급에 총력을 기울였다. 전날 알루미늄 물병의 물이 꽁꽁 어는것을 경
험했기에 일부러 물보다 어는점이 약간 낮은 포카리스웨트까지 준비했지만 이 역시 오래 가지는 못했다. 정상에 도달해서 뚜
껑을 열었더니 완전한 얼음은 아니지만 슬러시처럼 변해버린 포카리스웨트를 맛볼 수 있었다.
사이클의 업힐은 MTB와는 달랐다. 무엇보다 가장 낮은 기어조차 MTB의 업힐용 스몰체인링과는 천지차이라 MTB와 같이 평지와
같은 페달링으로 기어비만 낮춰서 느긋하게...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해머링만이 살길이다. 52t X 21t로 해머링 하다가 어
느정도 가속이 붙으면 39t X 15t로 바꿔서 안장코에 앉아 죽기살기로 페달링, 또다시 속도가 떨어지면 변속해서 해머링, 쉴
새없이 반복했다.
한가지 깨닫게 된것은 올라가다가 중간에 쉬면 다시 출발할때 체력 소모가 더 심해진다는 것이다. 쉴 수 조차 없다. 오로지
정상만이 살길이다. 한참의 업힐 끝에 추풍령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만세라도 부르고 싶었다. 대구까지 다 온 기분이었
다.
셀프도 찍으면 발전한다. 저 뒤에 보이는 “추풍령농
협미곡종합처리장“이라는 문구가 보이는가! 혹시 4번국도 이용할 분들 계시면 이 건물 보이는 시점이 추풍령 다 올라온 시
점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다. 고생 끝 행복 시작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여기부터 김천까지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내리막이
다.
야밤에 추풍령 넘고 싶지는 않다는 일념에 아침에 출발한 덕인지 다행히 한낮에 추풍령을 넘게 되었다. 하지만 고지대의 주
행풍은 장난이 아니었다. 50~60킬로의 속력으로 언덕을 내려오면서 페달질도 하지 못하니 손발 말단부터 얼어서 감각이 무뎌
지는데 언덕 내려가다가 쉬면서 스트레칭 하고 다시 내려가고 하니 서서히 평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도 맑고 죽 뻗은 길에 차한대 보이지 않는다. 좁
은 도시에만 갇혀 지내기보다는 저 넓은 길을 한번 달려보고 싶지 않은가.
추풍령 내려와서 김천으로 가는 길은 정말 평탄하고 차도 없어서 체력만 빵빵했다면 마음껏 달려보고 싶은 길이었다. 하지만
추풍령 올라오느라 기력을 소진해서 생각만큼 달리지는 못했다. 오늘은 대구에서 고향 내려간 후배를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대구까지는 가야만 한다. 사나이 내뱉은 말이 있는데 후배 앞에서 이미지 구길수야 없지 않는가...ㅎ
드디어 김천에 도착했다. 뒤로 영남제일문이 보인다.
그리고 또 하나 나를 기쁘게 하는 것... 이제는 식당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침에 컵라면만 먹고 연양갱과 쵸코바로 연명하면서 여기까지 달려왔기에 매우 시장한 상태였다. 게다가 추풍령을 내려오느
라 꽁꽁 얼어붙은 몸도 녹여야 하고 무엇보다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었다. 김천으로 들어서자 좌우에 식당이 즐비해서 어디
로 들어가서 뭘 먹을지 잠시 행복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결국 갈비탕과 해장국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해장국을 먹기로 결정했
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해장국집을 들어갔는데 공기밥은 무한 리필 가능하단다. 배터지게 먹고 다시 힘내어 출발.
영남제일문 지나자마자 보이는 해장국집에서 점심식사
를 해결했다. 해장국이 참 특이했다. 양곱창, 선지, 내장, 우거지등이 들어간 해장국인데 원래 맛있는 건지 라이딩 후에 먹
어서 그런 건지 밥을 세 공기나 먹었다.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은 주인아주머니가 매우 친절 하셧다는 것이
다.
밥을 먹고 나니 몸도 녹고 힘도 솟고 해서 빠른 속도로 구미, 칠곡을 지나 왜관쯤에 도착하자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형님 어디세요?'
`어 왜관이다.'
`대구옆에 왜관이요?'
`그럼 왜관이 또 어디 있냐?'
이녀석이 사람 말을 띄엄띄엄 듣고 살았나보다. 이녀석도 평범한 인간인지라 정말 이틀만에 자전거 타고 서울에서 대구까지
올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나보다. 대구 도착해서 전화 하면 녀석이 마중 나오기로 했다. 하지만 지리시간에도 배우지 않는
가 대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라고, 결국 대구를 가려면 산을 넘을 수 밖에 없는 팔자였다.
지도에 4번 국도만 따라가면 서대구 터미널이 나온다고 되어있기에 서대구 터미널에서 후배와 합류할 생각으로 약속을 정했
는데 도대체 서대구 터미널이 보이지 않는다. 알고보니 서대구 터미널은 상봉터미널보다도 더 작은데다가 간판에 불도 켜놓
지 않는 간이 터미널이었던 것이다. 서대구 터미널 코앞에서 서대구 터미널을 못찾고 한참을 헤맸던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
온다. 잠시 후에 후배가 마중을 나왔고 차로 집까지 이동 하였다. 후배와 함께 일식집에 가서 모듬회를 먹고 알콜릭 모드로
잠에 들었다.
당일 주행거리 163.12km
총 주행거리 340.39km
주행시간 8h 27m 06s
평균속력 19.3km/h
2004/12/30 D+2
예상했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피로에 알콜까지 더해지니 늦잠을 자고 만 것이다. 눈을 떠보니 10시였다. 얼른 갈길을
재촉하려 하였으나 후배 어머님께서 아침을 준비하시고 계셔서 거절하지도 못하고 일정은 점점 늦어져만 갔다. 후배 어머님
께서 이것저것 주시는 바람에 짐은 라이딩에 다소 부담스러운 수준이 되어버렸고 짐을 줄이기 위해서 빨아야 할 옷과 꼭 필
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물건은 추려서 후배에게 택배를 맡기라고 부탁하고 대구를 떠난 시간이 무려 두시 반이었다.
출발하자 마자 불행을 알리는 신호탄인 듯 체인이 끊어지는 사고가 발생, 체인커터를 들고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체인 한 칸을 끊어내고 다시 이었고 피로한 탓인지 알콜의 효험인지 바퀴의 구름이 다소 무겁게 느껴졌지만 크게 신경 쓸 정
도는 아니었기에 갈길을 재촉했다.
원래는 5번 국도를 타고 마산까지 가서 2번 국도를 타고 남해안 구경을 하면서 부산에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여유 부릴 시간
이 없다는 판단하에 다소 짧은 코스인 25번 국도를 타고 밀양에 가서 14번 국도를 타는 코스로 갈길을 수정했다. 하지만 지
금 생각해보연 이것이 결정적인 판단미스였던 듯 싶다. 애초에 돌아가는 길을 택했던 이유가 불필요한 업힐을 줄여보자는 의
도였는데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에만 눈이 멀어 험난한 길을 택하고 만것이다.
경산에서 청도로 넘어가는 길에 버티고 선 남성현재는 그중 가장 힘든 적이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것이 자연의
섭리이거늘 저기까지가 오르막인가보다 하고 올라가보면 다시 완만한 오르막길이 이어지고 오르막이 끝나보이면 뒤로 돌아서
다시 올라가고 완만한 오르막 끝에 다시 가파른 오르막 오르막 도중에 헤어핀등 갖가지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오르막이
끝나보이면 힘을 내서 올라가게 마련인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해서 죽기살기로 올라갔더니 또다시 오르막이 나오는 사태를
두세번 당하고 나니 주저 앉고 싶어졌다.
남성현재라는 끝없는 언덕의 정점이다. 삼각대 꺼낼
여력이 없어서 관광 안내도 앞에 자전거 갖다놓고 사진 한 컷. 왼쪽 구석탱이에 보면 남성현 쉼터라고 보이는데 식당이다.
식당에 누렁이 한 마리가 매져있는데 사진 찍는 내내 짖어댄다. 하긴 제 놈이 평생 자전거를 봤으면 몇 대나 봤겠는가... 생
소한 광경에 놀랄 만도 하지 싶다.
그래도 하나 다행인것은 따뜻한 남쪽나라로 내려와서인지 물통의 물도 얼지 않고 바람만 막아주면 체온 저하의 걱정이 없다
는 것이었다. 기차역이 보일 때마다 내가 왜 이고생을 하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참고 부지런히 고개를 올라
가는 수밖엔 없었다. 고개를 넘자 또다시 끝없는 내리막이 펼쳐졌다.
밀양이다. 사진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날이 어두워지
고 있었다. 부산까지 갈 길은 먼데 낭패다. 중도포기란 있을 수 없다. 힘이여 솟아라! 아 이건 히맨 대사인가?...ㅎㅎ
밀양을 통과할때쯤 해가 지기 시자했다. 아직 반정도밖에 못왔는데 어쩌란 말인가. 갈길을 재촉할 밖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본격적인 불행의 시작이었다. 진영에서 14번 국도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갑자기 뒷바퀴쪽에 스파크가 일더니 고무타
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펑크가 난것이다. 이틀 넘게 펑크 한번 안나고 잘 왔구나 싶었는데 갑자기 원인 모를 펑크라니 당
황스러웠다. 교차로 화단에 자전거를 세우고 튜브를 꺼내 갈았다. 타이어 옆면이 찢어져 있었다. 뭔가를 밟은것 같지는 않은
데 공기압이 너무 세서 그런가 싶어서 80psi정도만 넣고는 불안하게 출발했다. 김해까지 무사히 가면 부산까지 가는것이고
또한번 펑크가 나면 김해에서 머무른 뒤에 날 밝는대로 샵을 찾아 점검을 받기로 마음 먹고 시속 10킬로 정도로 서서히 출발
했다.
여전히 밀양인데... 뚜르 드 코리아 표시판이 보이기
에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삼각대 꺼내고 포즈잡고 한 컷 찍었다. 물론 내가 10킬로 온건 아니다. 착각하는 사람은 없겠지?
이때쯤 주행거리는 400을 향하고 있었다.
다행히 김해에 도달할때 까지는 연이은 펑크는 나지 않았다. 이때 반가운 친구의 연락이 왔다. 여행 떠나기 전에 우연히 싸
이월드에서 찾게 되어 부산에 가면 한번 볼까 싶어 싸이 문자를 보내놨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다음날 부산에서 만나기로
하고 김해 홈플러스를 발견하여 가볍게 식사를 하고 다시 출발하는 찰라에 이번엔 앞바퀴에 펑크가 났다.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 졌다. 한시간이면 부산에 도착할 터인데 여기서 주저 앉느냐 아니면 무리를 해서라도 부
산엘 가느냐. 결국은 무리를 해서라도 부산엘 가는 방법을 택하였는데 이것 또한 한번의 판단 미스였다.
연이은 펑크로 시간이 지체되고 불안한 마음에 서행을 하다보니 부산에 도착하자 시간은 거의 밤 12시가 되어갔다. 이제 터
널 하나만 통과하면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생각에 주의력이 산만해진 탓인지 지하철 공사장 복강판 위에 용접된 철근을 비껴
밟으면서 세번째 펑크가 났다. 가져온 예비튜브는 세개 이제 더이상 펑크가 나면 길거리에 앉아서 패치를 붙이는 수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조심스레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무슨 터널이 산꼭대기에 뚫려있는건지 남산정도의 높이를 올라가
서야 터널을 볼 수 있었다. 터널을 통과하여 내리막을 내려가기 시작할때 즈음 하늘에선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자전거 위에서 맞이하는 첫눈이란 독특한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하지만 내리막을 다 내려가고 보니 튜브에 공기압이 거의
다 빠져있었다. 숙박지까지는 전철역 두 정거장 정도. 모험을 하기로 했다. 바퀴에 공기압만 빵빵하게 채운 후 그대로 달렸
다. 한시라도 빨리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찜질방에서 묵을 생각이었지만 찜질방을 찾을 기력도 없고 타이어와 튜브도 손봐야겠기에 온천장 여관에 숙소를 잡았다. 시
내 여관보다 숙박비는 몇천원 더 들겠지만 그래도 온천이 조금이라도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되리란 판단 하에서였다. 방에 들
어가자 마자 바로 잠에 들었다.
당일 주행거리 125.45km
총 주행거리 465.84km
주행시간 8h 03m 07s
평균속력 15.6km/h
2004/12/31 D+3
아침에 일어나서 뉴스를 보는데 어젯밤 내린 눈으로 부산경남지방 곳곳이 교통 통제란다. 일단 투어는 종료쪽으로 가닥을 잡
고 여관 주인에게 오후 두시정도까지 있는다고 양해를 구한 뒤에 본드와 반찬고, 간단히 먹을것을 사왔다. 욕조에 물을 받고
튜브를 담궈가며 펑크난곳 체크하고 타이어가 손상된 곳은 튜브가 삐져나와 펑크가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천 반찬고를 붙
여서 임시로 처치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고 누가 말했던가. 어
차피 투어를 포기하기 된 마당에 잘 먹는 건 죄 짓는 것 같아서 아침을 빵쪼가리와 우유로 때웠다. 우유는 학교다닐때 많이
먹었던 부산우유가 보이기에 반가운 마음에 집어들었다. 사실 부산우유가 제일 맛있다. 근데 지금보니 우유 포장 10년전과
별반 달라진게 없는것 같은데 참 촌스럽다. 개인적인 우유 선호도는 부산우유-매일우유-서울우유-기타우유순이다. 강성원우
유라던지 파스퇴르우유등은 정말 입맛에 맞지 않는다.
찢어진 타이어를 보면서 이걸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
다가 임시방편으로 천 반찬고를 사서 붙였다. 집까지는 버텨 주겠지.
때워야 할 튜브 네 개... 튜브때우기의 달인이 될것인
가... 그나마 우리나라에는 번개표 패치라는 다른 나라에선 찾아볼수 없는 고성능 패치가 있어서 다행이
다.
여관을 나서 친구와의 약속장소인 부산대 앞으로 향했다. 날이 추워서인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게임방에서 시간을 때
우면서 도로 정보도 알아보고 집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부산대앞 풍경... 부산엔 유난히 여자들끼리 팔짱끼고
다니는 게 눈에 많이 띈다. 실은 서울에도 많은데 내 눈이 삐꾸라 잘 안 보이는 건가? 저기 학교 안엔 남남커플, 정문으로
들어가는 중인 여여커플, 남자끼리 손잡고 걸어나오는...- - 남남커플, 사진 정면에 팔짱낀 여여커플... 쪽문 쪽에는 남자
둘에 여자하나가 커피를 들고 있는걸 봐서 분명 커플은 아니다. 부산은 솔로 천국?
인터넷을 뒤지다가 알아낸 사실이 있는데 고속버스 터미널이 자리를 옮겼다. 잘 알아보지 않고 예전 기억대로만 찾아갔다가
는 헤맬 뻔 했다.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는 길은 귀환 결정이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 시켜줬다. 도로 표면이
얼어붙은 탓에 옆바람이 불면 자전거가 그대로 죽죽 밀렸다. 그래도 부산까지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해에 머물
렀다면 부산까지 와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원래 1000킬로미터 투어를 계획하였으나 절반정도에서
만족해야만 했다. 부산에서 올라오기 직전의 속도계. 462.92킬로를 표시하고 있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표를 끊고 나니 시간이 좀 남아서 부산의 별미 돼지국밥을 먹으러 갔다. 다른 지방 사람이 들으면 돼지
고기로 무슨 국밥을 끓이냐고 비린내 나서 그걸 어떻게 먹냐고 펄쩍 뛰겠지만 부산 사람은 국밥 하면 의례 돼지국밥을 떠올
린다. 그맛을 잊지 못해 서울에서도 애타게 찾았지만 결국 찾을수 없었던 돼지국밥. 오랫만에 먹어서인지 아니면 아침을 부
실하게 먹은 탓인지 그 맛은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였고 순식간에 국밥 한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부산 혹은 부산에서 매우 가까운 지방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돼지국밥. 이걸 먹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기에 결국 부산 터미널 구내식당에서 사먹고 말았다. 보기엔 순대국 비슷
한데 국물이 훨씬 진하고 고소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위에 살그머니 보이는 새우젓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소금 대신 새우젓
으로 간을 하는게 정석이다. 그래야 냄새가 나지 않고 시원한 맛이 난다. 그 위에 정구지(부추) 절임을 얹어 먹는
다.
3일간의 고된 일정이 사람을 이렇게 변화시켰다. 숟가
락 젓가락은 먹을 수 없는 게 한이다.
고속버스에 올라 잠을 청하였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이번에 가지 못한 코스는 다음에 날이 풀리면 꼭 가보고 싶다. 물론 그
때는 패니어를 달고 가야겠다. 눈을 감으면 자꾸 눈앞에 7번 국도가 어른거렸다.
부산에서 센트럴 시티 가는 고속버스 안이다. 아쉬움
을 남긴 채로 상경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날씨만 조금 좋았더라면 동해안을 달리고 있었을텐
데.
서울에 올라와서 집까지 가는 길은 너무도 멀었다. 평상시면 30분이며 갈 거리임에도 여행이 다 끝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순
식간에 덮쳐온 3일치의 피로로 인해 한시간이 넘게 걸렸다. 평상시엔 가뿐히 올라가던 언덕도 자전거를 끌어야만 했다. 집에
도착하니 밤 열두시였다. 짐을 풀 정신도 없이 곧장 잠자리에 들고 말았다.
비록 전 코스를 계획대로 마치진 못했지만 서울에서 부산까지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갔다는건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일단 대한민국의 어디든지 자전거에 배낭을 둘러메고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더 큰 기쁨은 무언가 해냈다는 성취감 이었다.
홀로 떠나는 여행은 중간에 포기할 수 없고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고 스스로의 힘으로 목적지까지 가야만 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삶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웬만한 힘든 고비가 있더라도 이번 여행을 떠올리며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인생은 누군가가 대신 살아줄 순 없는 것이니까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나약해지지 말자. 포기하지 않는다면 해내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Fin
egokid님! 경부 완주를 축하합니다. 새해맞이를 별나게 하셨군요.^^ 모든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요소들은 그들이 대부분 평범성을 과감하게 극복했다는 점입니다. egokid님도 머지 않은 장래에 크게 성공할 가능성을 미리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새해에도 벅찬 포부를 키워가시기 바랍니다.
가파른 업힐을 무사히 마쳤을 때 오는 카타르시스는 해냈다는 희열 보다 앞으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일 것입니다.
대한민국 어느곳 아니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부럽습니다.
힘든 여정을 무사히 마치심을 축하드립니다.
다음에 김해에 들르실 기회 있으시면 연락하세요
해돋이는 보신겁니까?? 축하드립니다. 계획을 알았다면 김천 지나 구미에서 합류할것을 안타깝네요. 혼자가는 여행은 왠지 쓸쓸해 보여서 계획만 세우고 있는데 ...
저는 2월에 부산까지 그리고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려고 합니다. 짧게 5일 길면 일주일 정도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 하십니다...저도 강원도 거진 에서 부산 까지 계획 하고 있는데 자꾸 미뤄 지네요...님의 글 읽고 나서 용기가 ..날씨도 추운데 알지못하는 외지를...혼자서 그렇게 완주 하셨다는거 ...살아가는데 있어서 무한한 용기와 자신감을 ....암튼 잘보고 용기 얻고..? 갑니다...
댓글이 마흔둘(글쓴이꺼 빼고)이나 달렸으니 축하한다는 말은 고만해도 될듯 싶네요. 후기를 읽던중 부산에서의 "돼지국밥"에 대한 추억이 생각나 차나 지나칠수가 없습니다.
대학4년 여름 동기들 3명과 함께 부산에서 시작해 동해안 일주를 계획한적이 있는데, 부산역에서 택배로 부친 고물잔차를 찾아 여행을 시작할 즈음, 채 부산시가지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텐트,버너등의 무게를 못이겨 밥집을 찾았습니다. 거기서 우연히 돼지국밥을 먹게됬는데, 그때의 맛을 지금도 잊을수가 없습니다.
국밥 사진을 본 순간 "종소리만 듣고서도 기억에 의존해 침을 흘리는 개의 조건반사" 작용이 나에게도 적용되어, 순간적으로 침을 턱까지 흘렸습니다. 쿨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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