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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와 우리는 왜 동쪽으로 갔을까 (속초 라이딩 투어 후기)

산울림2005.05.29 23:42조회 수 1571추천 수 2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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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에 다녀 온지 이제 일주일이 지났다.

그 이후 내 머리 속을 내내 지배해 오던 그 여정의 강렬한 이미지들이 이제는 조금은 무뎌졌지만 아직도 문득 문득 뇌리 속으로 튀어나오곤 한다. 쉴새 없이 깜빡이던 비상등의 불빛, 가로등에 반사되던 야광 바퀴, 희미하던 차선, 차가운 공기, 그저 무심하게 서있는 도로 표지판, 비어있는 들녘, 빵빵대는 차 소리, 내 숨소리, 햇볕, 갈증, 그리고 끊임없이 돌리고 또 돌리던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사람들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벅찬 도전의 대상에 맞닥뜨리게 된다. 작게는, 습관을 바꿔서 일찍 일어나기, 다이어트 하기, 술 줄이기, 담배 끊기 등등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누구도 해보지 못한 어려운 목표에 도전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일상에서의 도전은 우리가 사는 동안 이렇게 저렇게 계속 이어지게 된다.

이런 도전들을 접하게 될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 이다. 도전해서 극복하고 넘어가느냐 아니면 도전을 포기하고 다른 길로 돌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가장 쉬운 길은 도전을 그냥 포기하는 것이다. 어떤 길을 선택할 수 있는지 자신이 의사 결정 권한을 쥐고 있는 경우라면 쉬운 길을 간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한다고 해서 다른 현실적인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 중에는 그냥 쉬운 길을 가기 보다는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남들보다 더 뛰어나고 잘난 사람들이 아니고 누가 봐도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다. 다만 한가지 차이점은 인생을 얼마나 진지하고 의미 있게 살아가려고 하느냐 하는 것이다. 인생을 그저 쉽게 살아가겠다고 생각한다면 한없이 쉽게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어렵고 벅찬 도전을 그때 그때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서 극복해 냈을 때 갖게 되는 자신감과 성취감은 우리의 인생을 보다 값지고 의미 있도록 만들어주는 중요한 자산이 될 수 밖에 없다.

내 나이 이제 마흔다섯.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름대로는 인생을 보다 진지하게 살아보려고 노력해 왔다고 애써 생각하기는 하지만 과연 이런 저런 도전들을 모두 다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혀서 극복해 왔는지는 자신 있게 얘기하기 어렵다. 때로는 적당히 핑계 거리를 찾아서 자기 합리화를 해가면서 슬쩍 슬쩍 쉬운 길로 피해 다녔던 기억들이 사실 더 많다.

특히 마흔이 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런 경향이 더 심해져서 자꾸만 쉽고 편한 길로만 가려고 하는 자신을 문득 발견하는 때가 최근 들어 부쩍 늘었다. 내가 지금까지 사회 생활을 해온 지 이제 17년, 나이 60에 은퇴를 한다고 생각해도 이제 겨우 갓 절반을 마친 셈이다. 지금까지 보다 앞으로가 더 중요한 시점에서 자꾸만 나태해져 가는 자신을 보면서 마음 자세를 새롭게 다시 가다듬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자주 하곤 했었다.

자전거 동호회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 이런 저런 라이딩 경험들에 대한 얘기들을 접하면서 서울에서 속초까지 라이딩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게 되었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나와는 거리가 아주 먼 다른 사람들의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막연하게 언젠가는 나도 한번 생각해 볼만한 여정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굳이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시도 해봐야 할일 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도 않았고, 내 마음 속의 속초는 너무도 까마득하고 멀기만 해서 내가 자전거를 타고 거기까지 간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잘 연결이 되질 않았다. 그러던 차에 동호회에서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나에게 속초까지의 라이딩을 갑자기 제안을 해왔다. 먼 나라의 앨리스가 실체로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자전거에 입문한지 이제 겨우 5-6개월 정도, 장거리 라이딩 이라고 해 봤자 60키로 남짓 두어 번 해본 경험이 전부인데 속초까지의 200키로 라이딩은 나에게 너무도 벅찬 느낌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동호회 내에서 자전거를 나름대로 탄다는 고수들도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는 걸로 봐서 만만치 않은 도전이 될 것이 분명했다. 글쎄,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에 앞서서 내가 이걸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우선 들기도 했다. 자신도 한번도 시도해 보지 못한 벅찬 목표를 진지하게 제안하는 친구 앞에서 차마 거절하지는 못하고 애매한 대답으로 얼버무렸지만 어쨌건 내 생각은 처음부터 부정적이었다.

그러던 중에 그 친구에 의해 동호회에 정식으로 번개 형식으로 제안이 되고 함께 가겠다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면서 속초까지의 라이딩은 급속하게 추진되게 되었다. 막연하게 올해 안에는 가겠지 하고 생각하고만 있었던 일정도 구체적으로 결정이 되었는데 그것도 단 2주 뒤에 떠난다는 것이다. 갑자기 너무 많은 고민이 되었다. 아직 나는 준비가 안되었어, 너무 위험한 길이야, 그걸 굳이 이번에 할 필요가 있을까, 등등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이런 저런 핑계 거리들로 자꾸만 자기 합리화를 해가면서 참가하지 않는 쪽으로 내 자신을 몰아갔다. 가능하다면 그저 피하고 싶었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가 문득 지난번 구례에서 지리산 성삼재까지의 가파른 오르막 길을 비를 맞으면서도 묵묵히 자전거로 오르던 동호회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진지하게 자신과 싸우면서 벅찬 목표에 도전하는 모습들은 아주 숙연하고 감동적이었다. 그때 지레 겁을 먹고 도전을 포기했던 내 자신의 모습과 대비되면서 오랫동안 잔영이 후회로 많이 남았었다. 이번에도 만약 그냥 포기한다면 후회는 물론이고 나 자신에게 실망하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이번을 계기로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를 더욱 진지하게 바로 잡아야겠다는 거창한 명분까지 곁들여서 이번의 도전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일단 결정을 하고 나니 갑자기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남은 2주 동안 조금이라도 체력과 지구력을 키워야 한다.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얼마나 업그레이드가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최선을 다해서 준비해 보기로 했다. 그 사이에 며칠 동안의 일본 여행이 끼어 있는데다가 외국에서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기도 하고 몇몇 중요한 일정들이 들어있어서 충분한 시간을 내기는 어렵겠지만 어쨌건 되는대로 노력은 해 봐야 한다.

우선, 남은 기간 동안에 술을 최대한 자제하기로 했다.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술자리를 만들지 않고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두 번째로, 시간이 나는 대로 매일 집 앞의 호수공원을 몇 바퀴씩 자전거로 돌기로 했다. 시간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꾸준히 자전거를 타는 것이 지구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 다음으로는 될 수 있으면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몸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았다.

회사 일을 일정대로 해나가면서 틈틈이 동호회 친구들과 서로 역할 분담을 해서 이것 저것 준비물들을 준비하기도 하고 그러는 사이에 2주가 금방 지나갔고 어느새 출발이 다가왔다. 그 동안 계획한대로 다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 2주 동안 내내 속초를 생각하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마음 가짐을 진지하게 가다듬었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굳게 했다. 내가 이번 도전을 감당해 낼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는 않지만 얼마가 걸리던지 간에 완주를 목표로 노력을 해보기로 했다. 하루에 모든 일정을 마치는 것이 계획이기는 하지만 가다가 힘이 들어서 못 가게 될 것 같으면 중간에 혼자 숙박을 하고 끌고서라도 반드시 자전거로 모든 여정을 마치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한번 도전하기로 스스로 결정한 이상 이제 자신과의 싸움이 남아 있을 뿐이다.

코스는 서울에서 양평을 거쳐 홍천을 지나 인제, 원통, 그리고 미시령을 넘어 가는 국도로 결정이 되었다. 총 거리 188키로, 휴식과 식사 시간을 포함한 예상 라이딩 시간 13시간 이다. 출발 시각은 4월 23일 새벽 2시, 출발 지점은 복잡한 서울 시내를 벗어나서 바로 양평 쪽으로 출발이 가능한 6번 국도 팔당 대교 북단 지점으로 하기로 했다. 안전 문제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미시령을 넘어가야 하기 때문에 다소 위험 하기는 하지만 가능한 새벽 일찍 출발 해야 한다. 라이딩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서 모두 8명이었고 고맙게도 서포터로 지원해준 동호회 친구 2명이 지원 차량을 타고 뒤따르기로 했다.  

출발 전날, 회사 일을 오전 중에 마치고 일찍 퇴근을 했다. 이미 회사 직원들 몇몇은 나의 이번 도전을 알고 있어서 기대 반 걱정 반의 얼굴로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해 준다. 동호회 집합 장소인 일산의 한뫼샵에 들려서 자전거의 최종 점검을 마무리 하고 준비물들을 마지막으로 점검을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배낭을 챙겨 놓고 좀 쉬려고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아무 말이 없이 계속 지켜만 보고 있었던 집사람이 드디어 작정한 듯 한마디 한다. “꼭 속초에 가셔야만 되나요? 안 가시면 안되나요?” 그래, 꼭 가야만 한다. 지난 2주 동안 지내오면서 어느새 속초 라이딩은 내가 반드시 넘어야 할 인생의 숙제 같이 되어버렸다. 마치 이번의 라이딩을 해내지 않고서는 내가 인생에서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의미까지 갖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번에 안 하면 많이 후회할 것 같아” 라는 대답에 체념한 듯 너무 무리하지 말고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한다. 가다가 힘이 들면 충분히 쉬었다가 또 갈 것이고 무엇보다 안전을 고려해서 조심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켰지만 “길이 위험할 텐데……” 하면서 못내 걱정이 되는 눈치이다.

새벽 일찍 출발이라 초저녁에 미리 잠을 좀 자둬야 하는데 아무래도 잠이 오지가 않았다. 침대에 애써 누워서 뒤척이다 일어났다 가를 반복해 보다가 포기하고 원래 12시에 집합이지만 그냥 11시쯤 좀 일찍 나가기로 했다. 짐을 모두 챙기고 복장을 갖추고 나서 자고 있는 아이들에게 하나씩 뽀뽀를 해주고 아직도 걱정스런 아내의 눈인사를 뒤로 하고 자전거를 타고 한뫼샵으로 나갔다.  

샵에 도착해보니 이른 시각인데도 이미 다른 참가자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다들 나처럼 느긋하게 쉬고 있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고맙게도, 참가하지 않는 동호회 회원들도 응원 차 많이들 나와 주었다. 우리 동호회에서는 속초까지의 라이딩이 처음으로 시도되는 것이어서 모두들 관심도 많고 기대도 많이 되는 모양이다. 게다가 워낙이 한 가족같이 끈끈한 정이 대단한 동호회 인지라 자기 일처럼 앞장서서 준비물을 챙겨 주기도 하고, 음료수를 사오는 사람, 손수 김밥을 싸온 사람 등등 격려와 응원이 대단했다. 이번 라이딩을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생긴 셈이다.

12시가 넘어 모든 참가자들이 집합을 하고 나서 자전거들을 지원 차량과 배웅 해줄 차량에 싣고 출발 지점인 팔당대교 북단 지점으로 이동을 했다. 팔당대교 북단 조금 못 미친 6번 국도의 도로 옆 공터에서 차를 세우고 자전거를 내려서 모두 출발 준비를 했다. 새벽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날씨가 많이 차갑기는 했지만 앞으로의 기나긴 여정에 대한 압박감 때문인지 추위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간단하게 준비 운동을 마치고 나니 예정된 새벽 2시, 배웅 나온 동호회 친구들의 격려 속에서 어둠을 향해 라이트를 켜고 힘차게 페달링을 시작했다. 드디어 시작이다.

출발하면서 이번 라이딩은 나와의 싸움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조금이라도 경쟁을 하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의 페이스를 무작정 따라갈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내 페이스대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참가자들 중에서 내가 자전거 경력도 가장 짧고 실력도 가장 수준이 낮다. 내 능력 이상으로 조금이라도 무리를 했다가는 전체의 여정을 모두 다 마치지 못하고 낙오하게 될 수도 있다. 물론, 단체로 라이딩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 혼자 때문에 전체의 진행에 심한 지장을 주면 안되겠지만 내가 무리하다가 중간에서 퍼지기라도 하면 오히려 팀에 더 큰 부담을 줄 수도 있고, 이번의 도전은 무슨 거창한 대회에 나가서 팀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도전이다. 순위나 기록이 의미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의 최대의 목표는 내 힘으로 완주하는 것이다.

팔당대교 북단을 지나쳐서 5개의 터널을 순식간에 지났다. 이 터널 구간은 노견도 짧고 질주하는 차들이 많아서 위험하다는 얘기를 들었었는데 이른 시간이라 차량의 통행도 많지가 않았고 지원 차량이 뒤에서 지켜주며 따라오는 바람에 아무런 문제없이 편안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터널 구간을 지나고 나서 양평 쪽으로 계속 6번 국도를 따라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조금씩 풀리면서 페달링에 일정한 박자가 붙기 시작한다. 다리에 힘이 차는 느낌이 들면서 왠지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든다. 그래, 이렇게만 가자. 나뿐만 아니라 일행들 모두 일정한 속도로 대열을 지어서 무리 없이 잘 진행하고 있다.

조금 달렸나 싶었는데 앞서 갔던 지원 차량이 길옆 편의점에서 차를 세우고 정지하라는 신호를 해준다. 라이딩 계획을 짜면서 50분 달리고 5-10분 쉬는 패턴으로 진행하기로 했었는데 벌써 출발한지 50분이 넘었단다. 처음의 긴장감이 이제 풀리기 시작하면서 슬슬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거기까지도 응원하러 따라와준 고마운 동호회 친구들과 함께 따뜻한 커피를 한잔씩 하면서 다시 한번 파이팅을 나누고 다시 어둠 속으로 출발을 했다.

이제는 몸도 완전히 풀렸고 어두운 도로 주행도 적응되어 가면서 제법 라이딩이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다른 생각 하지 않고 앞서가는 동료의 라이트 불빛만 바라보면서 계속 따라가다 보니 저절로 자전거가 나가는 듯한 착각도 생긴다. 라이딩은 이렇게 점점 익숙해져 가는데 이제는 최대의 복병, 추위가 괴롭히기 시작했다. 4월말인데다가 요즘 들어 예년보다 더 따뜻한 날씨가 계속 되고 있어서 아무리 새벽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추운 날씨는 예상을 못했었다. 아래위 모두 얇은 봄 날씨 차림에 윈드 자켓을 하나 걸쳤는데 추위가 바람을 타고 온몸을 스며든다. 몸은 그래도 땀이 좀 나고 있어서 견딜 만은 한데 손과 발은 엄청나게 시려온다. 장갑과 신발 모두 얇고 통풍이 잘되는 여름용인지라 차가운 바람은 전혀 막아주지를 못한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사정이 마찬가지여서 ‘아이구 추워’를 연발하면서 달리고 있다. 두 번째 휴식 시간이 되었을 때 휴게소에 들러서 뜨거운 오뎅 국물을 나눠 먹으면서 추위를 조금 달래고, 임시변통으로 면장갑을 사서 손과 발을 감싸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길은 어느새 양평을 지나고 지금까지 따라 올라왔던 6번 국도는 44번 국도로 바뀌어 있다. 홍천군 남면에 도착할 무렵 이제 슬슬 동이 터오면서 시야가 트이기 시작한다. 어둠 속에서 그냥 막연하게 불빛만 보고 달리다가 날이 밝아지면서 경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니까 새로운 의욕과 힘이 생긴다. 한참을 의욕적으로 잘 달려가고 있는데 선두가 갑자기 속력을 높이기 시작한다. 너무 추워서 땀을 더 내려고 그랬는지, 날이 밝아지니까 나처럼 신이 나기 시작했는지 가뜩이나 나보다 더 실력이 좋은 친구들이 속도를 내기 시작하니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힘을 더 내서 따라갈까 생각해 봤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지금 잘 지켜가고 있는 페이스가 오버될 것 같아서 그냥 지금 속도로 계속 따라가기로 했다. 지금까지 진행해온 속도도 평균 시속 25-30키로 정도로 출발 전에 목표했던 평균 20키로 보다 이미 충분히 더 빠른 속도이다. 뒤쳐진 다른 친구들과 함께 페이스를 지켜가면서 따라가니 다행히도 멀지 않은 곳에서 선두가 멈춰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자신들 생각만 했던 것이 미안했는지 이번에는 고맙게도 우리를 선두에 서라고 해준다. 우리가 선두에 서서 가면 그 속도에 맞춰서 함께 진행해 주겠다는 것이다. 개인보다는 우리 팀 전체를 생각해서 모두가 완주할 수 있도록 서로 도와주겠다고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역시 고마운 친구들이다.

새로 뚫린 터널 때문에 며느리 고개를 쉽게 지나고 홍천읍 입구에 들어섰다. 인제로 가는 길로 방향을 잡고 나니 아침 7시경, 때마침 만난 휴게소에서 멈춰서 아침식사를 하기로 했다. 밤을 꼬박 새우고 달려온 터라 좀 피곤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는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견딜 만 하다. 아침식사를 든든하게 하고 나서 나름대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8시경에 다시 길을 나섰다.

따뜻한 국물로 든든하게 속을 채운데다가 해가 뜨기 시작하면서 이제 더 이상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주 불어오는 바람도 그다지 강하지가 않고 선선한 날씨여서 라이딩 하기에는 아주 좋은 날씨이다. 동료들의 배려 덕택에 선두에 서서 달려가니 후미에서 따라가는 것 보다 힘이 훨씬 덜 든다. 바람이야 더 맞겠지만 다른 사람의 페이스를 따라가야 하는 심리적 부담감이 적어서 더 낫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홍천에서 인제로 가는 길은 도로 확장 공사가 계속 중이어서 길 상태가 그리 좋지 않고 노견이 거의 없는 다소 위험 한 길이 계속 이어졌다. 모두들 함께 열을 지어서 조심스럽게 진행을 하니 다행히도 대부분의 차량들은 알아서 피해 가준다. 우리를 지나쳐가면서 격려의 의미인지 비상 깜빡이를 몇 번 깜빡여 주는 차들도 있었다.

신남을 지나 신남 선착장을 지나니 소양호를 따라서 가는 풍치 좋은 길이 펼쳐진다. 날이 많이 가물어서인지 아니면 모내기 철이라 일부러 물을 빼서 그런지 소양호가 바싹 말라있는 것이 왠지 애처로워 보인다. 38선 휴게소를 지나고 이제는 인제로 넘어가는 군축령이 다가오고 있었다. 원래 군축교를 지나서 군축령을 넘어가는 길은 그 경사도 상당히 가파르고 길이 구불구불해서 이번 라이딩 여정에서 미시령 올라가는 길 다음으로 힘이 들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널찍한 인제대교가 군축교 옆에 새로 놓여 있어서 길을 반듯하게 펴놓았고 새로 뚫린 인제 터널이 군축령 고개 아래를 대신 통과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속초를 가는지라 길이 바뀐 것을 모르고 공연히 부담만 잔뜩 가지고 왔었다. 아주 쉽게 인제 터널을 지나 신나게 인제로 들어가는 내리막 길을 달려 내려갔다.  

소양강을 끼고 달리는 길을 따라 인제읍을 지나고 내린천과 북천이 합해지는 합강리를 지나서 이제는 북천을 따라 펼쳐지는 길을 따라 원통 방향으로 향했다. 하도 외져서 ‘인제 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했다던 옛 사람들의 얘기는 이제는 전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길도 널찍하고 차량들의 통행도 많다. 원통을 지나쳐서 한계령 방향으로 가는 44번 국도와 미시령, 진부령 방향인 46번 국도가 갈라지는 지점인 한계 관광 민예단지에 도착을 했다. 이제 실질적 목적지인 미시령 정상까지 남은 거리는 30키로 정도, 이제 거의 다 왔다. 이때 시각이 12시 20분경, 이 근처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차를 몰고 앞서간 지원조가 근처에서 찾아낸 마당이 널찍한 식당에 자전거를 눕히고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느긋하게 흐르는 물에 피곤한 발도 씻어주고 간단하게나마 낮잠도 자면서 모두 휴식을 취했다. 마지막으로 이번 여정의 가장 벅찬 구간을 남겨 놓고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겠다는 생각에 다소 긴 느낌이 드는 2시간 동안의 휴식 시간을 가졌다. 2시 30분경, 휴식을 마치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마지막 구간을 향해 다시 출발을 했다.

한계 관광 민예단지에서 용대 삼거리까지 가는 길의 초입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우리나라의 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의 하나이다. 산들 사이에 계곡으로 푹 파묻힌 길이어서 양쪽의 풍광이 언제나 수려하고, 설악산 자락의 십이선녀탕과 백담 계곡에서 흘러 내린 옥색의 맑은 물들이 바위 사이로 굽이쳐 흘러내리는 북천의 상류 자락을 따라 올라가는 그림 같은 길이다. 여름에 차를 타고 이 길을 지나갈 때는 일부러 속도를 줄이면서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열어서 계곡에서 내려오는 시원한 바람을 즐기면서 가곤 했던 기억도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올라가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컨디션이 뚝 떨어지면서 경치를 즐길 겨를이 전혀 없다. 너무 휴식을 오래해서 리듬이 끊겨서인지 아니면 이제는 다 왔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려서인지 다리에 힘이 없고 자꾸만 속도가 떨어진다. 게다가 계곡에서 불어 내려오는 강한 맞바람 때문에 앞으로 나가기가 더욱 힘이 든다. 선두와는 이미 거리가 벌어졌고 한 바퀴, 한 바퀴가 이제는 고역이다. 처음으로 맞는 고비다. 애써 머리를 비우고 그저 기계적으로 페달을 밟아가는데, 어느덧 10시간 같았던 한 시간이 지나고 진부령과 미시령 길이 갈라지는 용대 삼거리에 도착을 했다.

이제 미시령 정상까지는 7키로 정도 남았다. 아무리 벅찬 오르막 길이라고는 하지만 지금까지 달려온 170 키로의 여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컨디션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자꾸 자신감도 함께 떨어지는 것을 애써 추슬러 올렸다. 마법의 빨간 구두를 본인이 원해서 신기로 결정한 이상 도끼로 다리를 자르기 전에는 멈출 수 없다. 끝을 봐야 한다. 용대 삼거리에서 마지막으로 휴식을 취하고 미시령으로 올라가는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미시령으로 출발하면서는 일행들을 모두 다 먼저 보내고 가장 후미로 출발을 했다. 지금 컨디션으로 봐서 어차피 가장 뒤쳐질 것이 분명하다. 다른 일행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내 페이스대로 천천히 가는 것이 모두에게 낫다. 미시령으로 올라가는 길은 친절하게도 매 1키로마다 정상까지 얼마가 남았다고 표시가 되어 있다. 지쳤을 때는 목표에 대한 의식을 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가는 편이 더 나은데 1키로마다 표지판이 계속 나오니 이게 사람을 더욱 지치게 만든다. 동전의 양면처럼 생각하기 나름인데 5키로 남았다는 표지판을 보고 5키로 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보다 아직도 5키로나 남았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더 앞선다. 몸이 피곤하고 힘이 들어서 그런 모양이다.

4키로인가 남은 지점에서 잠시 내려서 쉬었다. 자전거에서 내리지 않고 미시령 정상까지 한꺼번에 올라가는 것을 의미 있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것보다는 완주가 가장 큰 목표이다. 다행히 나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 한 명도 나와 비슷한 페이스로 가고 있어서 큰 위안이 되었다. 속초까지의 라이딩을 처음 나에게 제안했던 바로 그 친구였다. 끈기와 열정이 아주 대단한 멋진 친구이다. 그래, 시작을 같이 했으니 끝을 같이 하자. 친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천천히 올라가는데 지나가는 차에서 파이팅을 외쳐주는 소리들이 계속 들린다. 아무런 면식이 없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면서 격려를 해주니 고맙기도 하고 없던 힘이 더 난다. 이제 마지막 1키로, 친구와 서로 격려를 해가면서 함께 마지막 힘을 다해 한 바퀴씩 남은 길을 올라갔다.

미시령 휴게소의 간판이 보이면서 시야가 툭 트였다. 오른쪽으로 울산 바위와 저 멀리 동해 바다가 내려다 보인다. 마침내, 미시령 정상에 도착했다. 13시간을 넘게 달려온 탓인지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고 그저 머리가 멍하기만 했다. 그러더니 이런 저런 느낌들이 잘 정리가 되지 않고 그냥 이리저리 튀어나왔다.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 뭔가 해냈다는 뿌듯한 느낌…… 기타 등등. 어쨌건 내가 목표했던 도전에 성공했다. 내가 지금 해낸 일이 뭐가 되었던지 간에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거면 되었다.

속초에 다녀오고 나서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내 속초까지의 여정이 계속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그 강렬했던 기억 들이란…… 내가 스스로 선택했던 일상에서의 도전들 중에서 가장 강한 느낌을 주는 일종의 사건이었다. 다시 돌아온 일상, 겉으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뭔가 벅찬 도전을 만났을 때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혀 볼 수 있는 약간의 용기와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일전에 최동호 라는 시인이 쓴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라는 부제가 붙은 시집을 읽은 적이 있다. 여기에서 시인은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서 자아를 찾아 떠나는 구도의 길로서 동쪽 행을 묘사하고 있었다. 감히 구도의 길까지는 아니지만 이번에 내가 선택한 속초 행도 내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따라 결정했던 여정이었다. 편한 현실적 선택에 그저 안주하기 보다는 인생을 좀더 진지하게 살아야겠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자세를 가다듬기 위한 길로 속초 행을 선택한 것이다. 달마와 우리는 그래서 둘이 아니고 우리는 그렇게 동쪽으로 갔다.


맺는 말: 이번 속초 라이딩 투어를 함께 한 일산의 Santa MTB Club(www.santamtb.com) 동호회 친구들, 채이식(오솔길), 이치욱(한뫼), 조동원(사라), 심상명(산이슬), 정현출(희륜객), 이치갑(아마존), 박대준(대화도령), 에게 깊은 감사와 우정을 보낸다. 모두들 자신들도 처음 시도해 보는 벅찬 여정인데도 내내 우정과 격려로 서로를 먼저 배려했다. 이 친구들의 사려 깊은 배려가 아니었으면 이 벅찬 여정을 쉽게 마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들을 희생해 가면서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서포터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준 김용근(푸른하늘), 강혜정(두루미) 두 분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우리 팀의 성공적인 완주는 모두 이 두 분의 덕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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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글은 바이시클라이프 6월호에 독자에세이로 기고했던 글입니다. 바이시클라이프에서는 전체 내용에서 일정 부분이 다소 삭제되어 게재 되었는데, 저의 느낌을 동호인들과 가감없이 함께 하고 싶은 생각에 여기에 삭제되지 않은 전문을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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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 너무 감동적으로 잘 읽었습니다... 우선 속초라이딩을 무사히 마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글을 읽는동안 마치 제가 도로위에서 달리는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어느새 저의 머리속에서도 미시령으로 향하는 제모습을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언제나 즐겁고 안전한 라이딩 하세요^^
  • 캬~ 아름답습니다. 브라보!!
  • 즐거운 라이딩 추억 만들고 오셨네요...저도 한번 가봤으면 하는 바램이 드네요..^^*
  • 너무 좋은 후기 입니다. 본 후기를 제가 속해있는 동호회 홈피에 퍼가도록 허락 부탁 드립니다. 저희도 지금 장거리 투어를 계획 중에 있어서 회원들에게 자신감을 주고 싶습니다.
    감사 합니다.
  • 산울림글쓴이
    2005.6.2 11:06 댓글추천 0비추천 0
    모두 고맙습니다. 원하시면 얼마든지 퍼가셔도 됩니다. 요새 날씨가 좋아서 속초 라이딩이 붐이군요. 모두들 즐거운 라이딩 하시기 바랍니다.
용용아빠
2024.06.17 조회 73
treky
2016.05.08 조회 681
Bikeholic
2011.09.23 조회 8118
hkg8548
2011.08.04 조회 7170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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