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역시 인간적인 조우와 교감을 나누는데 그 진정한 맛이 있다.
말이 안 통하는 것은 좀 불편한 것일 뿐 결코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래선지 왕년의 유명한 세계여행 전문가 김찬삼씨는 세계 공통어는 바로 '미소'라고 했다.
극히 자연스런, 그리고 진정한 미소를 지으려면 지구촌의 인간들은 누구나 고독한 한 개체임을 이해해 줄 정도로, 마치 무슨 도사같은 넓디 넓은 포용력이 필요할런지도 모른다.
하여튼 실제로 영어도 못하면서 유럽을 잘만 돌고 왔다는 바이커도 있고 보면 역시 제일 큰 문제는 아무래도 끝없는 도전정신과 활화산 같은 열정의 여부에 귀일 되는 것 같다.(맨 위의 사진은 유목민 겔에서 본 해돋이로 앞쪽의 희끄므레한 것은 양떼다. 이들은 주위가 환해지면 리더의 인솔로 초원으로 풀을 먹으러 가버리기 때문에 유목민 부인은 새벽 3시면 일어 나 양젖을 짜러 나간다고 했다.)
테랠지 가는 길을 거슬러 나와 비포장 지름길(점선)로 빠가눌행 국도로 접어 들고는
마치 한 없이 뻗어 있는 듯한 일직선 길로 동진을 계속했다.
빠가눌 행 도로로 접어들어 얼마 못가 여행을 가다가 길가에 소형 승합차를 주차해놓고 돗자리따위도 없이 초원에 둘러 앉아 점심인듯한, 풀밭위의 음식들을 맨 손으로 먹는 10명에 이르는 일가족을 발견, 속으로 '여~가족 소풍풍경이구나.'라며 가까이 가 한국인 자전거 여행객임을 밝히고 사진을 좀 찍게 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들은 너무 초라한 점심판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던지 완강하게 거부했는데 그 가운데 아주 교양미가 넘치는 한 노부인(자감, 필자의 오른쪽)은 고급스런 영어로 거절하는 말을 건네기에 용서를 구하고는 서툰 영어로 '부인의 얼굴에는 행복이 너무 가득하군요.'라고 해줬드니 비프와 햄 덩어리, 그리고 이 곳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코코아빵 몇쪽과 양젖이 든 잔까지 권해 좀 부족했던 점심을 보충할 수 있었고.. 또 기념 사진도 허락했으며 메일 주소도 주고 받았다.
할아버지서 부터 코흘리게까지 인척관계의 네 가족이 함께 여행에 나섰다는 얘기도 해 준 그 여인은 손을 흔들며 배웅을 해줬고 차에 올라 나를 추월할때는 차창으로 손을 흔들어 줬다.
다음은 귀국후 그에게 사진을 보냈드니 그의 딸이 미국에 갔다는 엄마대신 답을 보내 온 내용이다.
Hello,
How are you? I'm Jargal's daughter. I got your
previous mails and photoes, and showed to my mama.
But my reply to your e-mail wasn't sent by some mistake.
My mama told us about you, about your travel, and she was
happy to see the photoes and mail. Thank you.
I hope she will write you when she gets back to the USA.
Good luck.
Take care.
Bye.
넓디넓은 대초원 한 가운데서의 한국과 몽골의 대학생 3백명 규모의 친선 훼스티발 장은 그 임시성과 갑작스러움으로 마치 환상 같기도 했고 심지어 신기루 같기도 했다.
우연히 이 행사장에 흡입되어 들어간 외로운 나그네는 모처럼 잠시나마 인간적인 어떤 향수에서 벗어 나 고적함을 털어 버릴 수 있었고 매점에서 빅사이즈 하이트 캔 맥주(일반 가게에서는 950투그릭-한화 850원정도-였으나 임시 매점인 이 곳서는 호텔값인 2천투그릭)를 사 마시며 육체적인 갈증도 풀수가 있었다.
이 런 들뜬 분위기속에서 현지에 와있던 조선일보 기자와도 조우함에 따라 얼떨결에 인터뷰가 이뤄졌고 결국 조선 닷컴에 이 노바이커에 대한 극히 가벼운 터취의 기사와 사진까지 오르게 됐다.
그리고 귀국후 성씨의 한자(裵)가 잘못 나온것(裴) 등등에 항의를 한 결과 최형석기자가 정정을 하고 또 할아버지 호칭도 다 뽑아내고는 실례를 범해 죄송하다는 메일을 보내 왔다.
홀연히 대 초원을 홀로 가로 질러 온 노바이커를 처음 목격한, 이 행사에 참가중인 성균관대학교의 천수민군(정치과 2년)은 너무도 먼 이 곳에서 엄청나게 의외스러운 이 만남에 마치 큰 아버지라도 만난 듯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고 심지어 감격해 했다.
실은 그 도 바로 이 노바이커같은 호젓한 여행이 오래전 부터 품어 온 꿈이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한국과 몽골 양쪽에서 각각 남여 대학생 1백 50명씩이 참가하고 있는 이 모임에서 서로 다른 나라의 남여가 짝을 지워 하는 프로그램 활동도 있어 절로 친해진 몽골 여대생 둘이 지나가자 그가 불러서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허나 이 캠프에 간것은 이날의 최종 목적지 방향인걸로 착각, 길을 잘못 든 결과여서 입구서 17키로라는 사실을 상기, 이 행사장보다 더 깊숙히 들어 가 한동안 헤매다 되 나오기도 했다.
다시 목적지인 스태프 노매츠 캠프를 향해 대 초원 한 가운데로 뚫린 포장 국도를 따라 외로운 항정이 시작되었다. 가끔 차량들이 1백키로에 가까운 속력으로 마치 대륙이라도 횡단하듯 내 달린다.
카메라는 좁은 시각의 앵글인 만치 이 광활한 대 초원을 한 자리에 서서 무비카메라로 360도 돌려 가며 촬영해 보여 주지 않는 한 어떻게 글로 표현을 제대로 다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다.
이래서 결국 체념하고는 무념무상이 되어 마치 등산인들이 산이 있기에 무작정 정상까지 오르는 것처럼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미지의 그 곳을 향해 쉼없이 부지런히 패달을 밟고 또 밟았다.
마치 고도(GODOT)를 기다리다 못해 찾아가고 있는 방랑자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 곳에는 엄청난 고통과 번뇌가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르면서도 그저 낙관적인 희열만 기대하면서 또 추구하기 위해서다.
하기사 모든 것이 운명이기도 하지만 이런 것이 인생의 삶 그 자체가 아닌가...
불과 17키로, 이를 우습게 알고 땅거미가 지고 있음에도 대 초원을 가로 질러 스태프 노매츠 캠프로 가는 길로 달려 들어 갔다가 두번째로 미로를 헤매게 되었다.
날은 어두워 졌고 시장기와 피로가 물밀듯이 몰려오고 있음에도 물어 볼 사람은 보이지도 않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대초원 뿐이라서 암담하기만 했다.
이통에 결국 진짜 외딴 오리지널 유목민의 겔에서 하룻 밤을 신세지게 되었지만 .의외의 좋은 체험이 됐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하루를 예비일로 더해 6박으로 했던 것도 잘한 일이었고 또 전화위복의 결과가 된 셈이기도 했다.
벽지 시골의 유목민임에도 매우 엽렵하게 보이는 부인(37, 바이르 샤홍)이 양젖을 기계로 정제하고 있는데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알아서 내 잔차를 이사용 콘테이너 박스(이사를 자주해야 하는 유목생활인 만치 아예 대형 트럭 바퀴까지 달려 언제든 이삿짐을 싣고 트럭이 끌고 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안에 넣어 줬던 그의 외아들(15, 바강 토닥카)과 진귀한 복색의 이 이방인을 구경하러온 이웃집 딸내미들이 디카의 3방연속 후랫쉬등등 모든 것이 신기하듯한 표정으로 계속 지켜 보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딱 하나 뿐인 이웃 겔집 사람들이 TV시청을 위해 그래도 이 일대에서는 잘 사는 집인 듯한 이 겔로 모여 들었다.
겔 밖에 솔라판 두개를 기둥에 메달아 낮동안 태양열로 방안의 축전지(오른 쪽의 내가 이날 밤 잠을 잔 침상 발치에 놓여진 것.)를 충전해 대형 인공위성 안테나로 14인치 흑백 TV(인도의 연속 방송극이 방송되고 있었다)를 시청하고 또 불과 20와트도 안될 듯한 흐릿한 불빛의 전구 한개를 켜고 있었는데 스위치 따위는 없어 아예 주인장이 직접 맨손으로 집게를 집어 초저녁에 전선을 밭데리에 연결하고 취침전에는 떼내고 있었다.
왼쪽에는 난방과 취사 겸용인 소똥 말린것을 연료로 이용하는 철판으로 만들어진 난로가 있는데 이튿날 아침 부인이 이 난로 뚜껑을 열고 그 위에 반구형 양은 그릇을 올려 놓고는 이 손님을 위한 아침 밥상을 위해 쌀밥을 짓고, 양고기 조림을 만들고, 겨란 후라이까지 만들어 미안했고 엉거주춤하게 서서 힘들게 요리하는 모습에 안스런 느낌마저 들었다.
주인장의 외아들과 그리고 손위 인척이라서 거둬 함께 살고 있다는 딸내미와 더불어 겔속 화로가에서 기름에 튀긴 빵, 양젖으로 만든 버터, 설탕, 양젖 차등으로 저녁을 먹고 있는, 부인이 셔팅해준 사진이다. 가운데 보이는, 양쪽 사진틀 가운데 있는 제단은 라마교 부처님을 모셔 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날 밤 취침직전 주인장과 더불어 소피를 보러 겔 밖에 나갔다가 올려다 본, 하늘의 유난히 영롱하던 별빛에 반해 버렸다.
어릴때 본 북극성과 북두칠성, 카시오페아에 심지어 남극성의 반짝거림은 마치 보석 같아 너무도 매혹적이었다
이튿 날 아침 선물용으로 가져 간 특별한 디자인의 타올등과 더불어 출국전 인터넷으로 입수한 정보이기도 한, 이 몽골에서의 관례대로 약간 액의 달러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사례금으로 내 놓자 부인은 부군을 곁눈질로 한번 쳐다보고는 저 부처님 제단위에 올려 놓겠다는 시늉을 해보이며 정중하게 두 손으로 받아 올려 놨다.<다음 최종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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