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기독교인임을 밝힙니다
1890년 후반에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습니다.
당시 유교가 득세하고 있던 우리나라 역시 기독교에대한 박해와 지금 아프칸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많은 일들을 하였지만 그 일들은 지금 사람들 기억에는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당시 그들이 온갖 멸시와 위협을 받으면서도 들어와서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짓고, 빈민을 돌보는 일을 하였습니다. 당시 이 나라 위정자들은 뭐했는지 모르겠지만서두요.
지금의 연세대, 이화여대, 그리고 그에 부속되어있는 병원들의 시작이 어디인줄 아십니까? 많은 우리나라 국민들이 욕하고 있는 아프칸에 갔던 젊은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젊은이들이 그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와 희생한 것입니다. 지금이야 그 설립취지와는 무색하게 많이 희석되고 변질되어버린 곳들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겁니다. 그당시 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희생해주지 않았다면 온갖 모욕과 위협과 죽음을 무릎쓰고 들어와서 봉사하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요?
어떤면에서 보면 우리나라 역시 소외되고 버린바 된 것과 같은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모르는 것 아닙니다. 부유한 계층들이야 호의호식하면서 잘 살던 시절, 상놈이라고 사람취급도 못받던 사람이 대부분이 던 시절, 굶기를 밥먹듯하고, 배움의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살던시절에....누가 좋아서 이 나라 들어와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짓고...하겠습니까?
바로 기독교인들이 자기를 희생해서 한 겁니다. 결코 돈이 남아돌아서 자기 나라는 그런 불쌍한 사람 한사람도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조금만 마음을 넓게가져서 세계 곳곳에 우리를 필요로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입니다.
이번 아프카니스탄에 갔던 사람들은 우리 조상들이 진 빚을 갚으러 간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우리나라 아무리 못사네 어쩌네 해도 굶어죽는 사람 거의 없지 않습니까?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도 거의 없지 않습니까?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 거의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나라는 이슬람권이 아니라 이런 혜택을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정도로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는 나라 사람들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어찌 보면 빚진 것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빚이 나의 빚이라고 생각해서 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저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저와 같은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용기 있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곰곰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조상 때에 우리를 위해 피흘려주고 위협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죽여도 굴하지 않고 이 땅에와서 많은 것들을 베풀고 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일어난 일로 분노하시는 분이라면 기독교 이름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매년 1만원정도는 자선과 구호 사업을 위해 내놓으시는 분이겠지요? 그렇다면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조상때에 그들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면 이제 우리 후손들이 그 받은 빚을 갚아야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러한 빚을 갚을 마음이 있고 작으나마 실행해나가고 있습니다.
다음은 당시 아프카니스탄 못지 아니하였던 우리나라에 들어와 봉사하고 헌신하신
로제타라는 선교사님에 대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로제타 선교사는 한국에 여자 의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정보를 듣고 조선에 선교사로 가기 위하여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병원실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윌리암 제임스 홀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고 윌리암 제임스 홀 선교사는 로제타의 미모와 성품과 성실성에 반해 한평생 함께 사역하기를 원하여 청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로제타는 그 프로포즈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윌리암 선교사는 이미 중국 선교사로 가기로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제타도 윌리암 제임스 홀 선교사를 좋아하고 있었지만,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선에 오기 위하여 윌리암의 청혼을 거절하고 한국에 처녀의 몸으로 혼자 들어옵니다.
윌리암은 로제타가 조선을 향해 떠난 후, 결국 선교부에 찾아가 선교지 변경을 요구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윌리암은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1891년 12월 한국 땅에 오게 됩니다. 그들은 벙커 선교사의 주례로 1892년 6월 21일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 결혼식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이 되었습니다.
닥터 홀 선교사는 평양선교를 위해 개척 책임자로 임명되어 평양선교를 시작하게 됩니다. 첫 아들 셔우드 홀이 태어나는 그 다음해 메켄지 목사와 함께 평양으로 들어갔습니다. 현, 서울 광성고등학교의 모교인 광성학당을 시작하면서 교육사역과 병원사역을 하면서 평양에 있는 조선인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 7월에 일어난 청일전쟁으로 평양은 전쟁터가 되었고, 닥터 홀 선교사님은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다가 자신이 병에 감염되게 되었습니다.
일본군 패잔병과 함께 서울에 도착한 홀은 로제타와 아들 셔우드 홀의 손을 붙잡고 마지막 기도와 유언을 하고 끝내 숨을 거두게 됩니다. 한국에 온지 2년만에 그는 한국 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양화진 죤 해론의 묘 옆에 묻혀있습니다.
로제타는 임신말기에 있었기 때문에 어린 아들 셔우드를 데리고 아이를 낳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귀여운 딸 에디스가 태어나게 되었고, 얼마 후 , 윌리암 제임스 홀의 모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제임스 홀의 모습을 닮은 셔우드 홀과 딸 에디스를 본 모든 교우들은 눈물로 그들을 반겼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로제타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 남편 윌리암 제임스 홀이 이루지 못한 조선 사랑을 네가 이루어라"
로제타는 아들과 딸을 데리고 다시 조선으로 오게 됩니다. 조선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랑하는 딸이 또 한국의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그 딸을 남편 묘 옆에 묻으면서 다시 한번 결심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 사랑하는 내 아들 셔우드 홀과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
로제타 선교사는 남편과 딸을 잃었지만 어린 셔우드를 키우면서 조선 사랑을 실천해 나갔습니다. 그는 평양의 홀 기념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여자환자를 위한 광혜여원을 개원하였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병원을 개원하여 맹인소녀들에게 점자를 교육하면서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를 세웠고, 맹인학교를 확충하여 농아교육도 시작하였습니다.
박점동이라는 한국 여인을 유학시켜 한국 최초의 여의사로 만들었으며 지금 서울 동대문 옆 이화여대부속병원 또한 로제타 선교사가 세운 병원입니다. 서울에 경성 여자의학 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그 병원이 지금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이 되었으며 인천의 간호대학과 기독병원이 모두 로제타 선교사가 세운 병원입니다. 43년간의 한국 사역을 통해 하나님은 큰 일을 이루셨습니다. 미국은 그의 사역을 인정하였고 로제타 선교사는 미국이 뽑은 200대 여인의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어 남편과 딸이 묻혀있는 양화진에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아들 셔우드 홀도 부모님의 조선 사랑을 이어갔습니다. 16세 때에는 선교사님들의 연립주택을 지어주면서 아르바이트를 하였고,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내면서 누구보다도 정들었던 박 에스더라는 최초의 한국 여의사가 결핵으로 숨지게 되자 큰 충격을 받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가 된 셔우드 홀은 결혼하여 부인 메리안과 다시 한국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는 한국 최초로 결핵협회를 창설하였고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판매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선 사랑을 이어가던 셔우드 홀에게 어려움이 왔습니다. 일본과 미국의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 정부는 셔우드 홀을 헌병대에 연행하여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시켜 징역 3년과 5000엔의 벌금형을 내립니다. 가재도구와 집을 팔아 끝까지 한국에 남아있기를 원했으나 결국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셔우드 홀 부부는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쫓겨난 후 셔우드 홀 부부는 인도로 건너가 마지막 힘을 다하여 인도선교에 전념하였습니다.
닥토 홀이 은퇴하여 캐나다에서 쉬고 있던 어느날 그는 한국에서 온 편지를 받았습니다. 결핵협회와 아버지가 세운 광성고등학교에서 보내 온 초청장이었습니다. 91세의 나이로 사랑하는 한국 땅을 밟은 셔우드 홀 부부의 감회는 남달랐습니다. 그는 양화진에 묻혀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의 묘를 방문하고 광성고등학교 예배시간에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유언을 남깁니다.
"I'm still love Korea .....
저는 여전히 한국을 사랑합니다. 제가 죽거든 나를 절대로 미국이나 캐나다 땅에 묻지 마시고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사랑하는 이 나라, 또한 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누이동생이 잠들어 있는 한국 땅에 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9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그의 부인과 함께 아버지인 윌리암 제임스 홀 선교사, 어머니 로제타 선교사, 동생 에디스가 묻혀있는 양화진 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1890년 후반에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습니다.
당시 유교가 득세하고 있던 우리나라 역시 기독교에대한 박해와 지금 아프칸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많은 일들을 하였지만 그 일들은 지금 사람들 기억에는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당시 그들이 온갖 멸시와 위협을 받으면서도 들어와서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짓고, 빈민을 돌보는 일을 하였습니다. 당시 이 나라 위정자들은 뭐했는지 모르겠지만서두요.
지금의 연세대, 이화여대, 그리고 그에 부속되어있는 병원들의 시작이 어디인줄 아십니까? 많은 우리나라 국민들이 욕하고 있는 아프칸에 갔던 젊은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젊은이들이 그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와 희생한 것입니다. 지금이야 그 설립취지와는 무색하게 많이 희석되고 변질되어버린 곳들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겁니다. 그당시 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희생해주지 않았다면 온갖 모욕과 위협과 죽음을 무릎쓰고 들어와서 봉사하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요?
어떤면에서 보면 우리나라 역시 소외되고 버린바 된 것과 같은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모르는 것 아닙니다. 부유한 계층들이야 호의호식하면서 잘 살던 시절, 상놈이라고 사람취급도 못받던 사람이 대부분이 던 시절, 굶기를 밥먹듯하고, 배움의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살던시절에....누가 좋아서 이 나라 들어와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짓고...하겠습니까?
바로 기독교인들이 자기를 희생해서 한 겁니다. 결코 돈이 남아돌아서 자기 나라는 그런 불쌍한 사람 한사람도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조금만 마음을 넓게가져서 세계 곳곳에 우리를 필요로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입니다.
이번 아프카니스탄에 갔던 사람들은 우리 조상들이 진 빚을 갚으러 간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우리나라 아무리 못사네 어쩌네 해도 굶어죽는 사람 거의 없지 않습니까?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도 거의 없지 않습니까?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 거의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나라는 이슬람권이 아니라 이런 혜택을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정도로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는 나라 사람들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어찌 보면 빚진 것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빚이 나의 빚이라고 생각해서 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저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저와 같은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용기 있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곰곰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조상 때에 우리를 위해 피흘려주고 위협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죽여도 굴하지 않고 이 땅에와서 많은 것들을 베풀고 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일어난 일로 분노하시는 분이라면 기독교 이름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매년 1만원정도는 자선과 구호 사업을 위해 내놓으시는 분이겠지요? 그렇다면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조상때에 그들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면 이제 우리 후손들이 그 받은 빚을 갚아야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러한 빚을 갚을 마음이 있고 작으나마 실행해나가고 있습니다.
다음은 당시 아프카니스탄 못지 아니하였던 우리나라에 들어와 봉사하고 헌신하신
로제타라는 선교사님에 대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로제타 선교사는 한국에 여자 의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정보를 듣고 조선에 선교사로 가기 위하여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병원실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윌리암 제임스 홀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고 윌리암 제임스 홀 선교사는 로제타의 미모와 성품과 성실성에 반해 한평생 함께 사역하기를 원하여 청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로제타는 그 프로포즈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윌리암 선교사는 이미 중국 선교사로 가기로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제타도 윌리암 제임스 홀 선교사를 좋아하고 있었지만,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선에 오기 위하여 윌리암의 청혼을 거절하고 한국에 처녀의 몸으로 혼자 들어옵니다.
윌리암은 로제타가 조선을 향해 떠난 후, 결국 선교부에 찾아가 선교지 변경을 요구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윌리암은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1891년 12월 한국 땅에 오게 됩니다. 그들은 벙커 선교사의 주례로 1892년 6월 21일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 결혼식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이 되었습니다.
닥터 홀 선교사는 평양선교를 위해 개척 책임자로 임명되어 평양선교를 시작하게 됩니다. 첫 아들 셔우드 홀이 태어나는 그 다음해 메켄지 목사와 함께 평양으로 들어갔습니다. 현, 서울 광성고등학교의 모교인 광성학당을 시작하면서 교육사역과 병원사역을 하면서 평양에 있는 조선인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 7월에 일어난 청일전쟁으로 평양은 전쟁터가 되었고, 닥터 홀 선교사님은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다가 자신이 병에 감염되게 되었습니다.
일본군 패잔병과 함께 서울에 도착한 홀은 로제타와 아들 셔우드 홀의 손을 붙잡고 마지막 기도와 유언을 하고 끝내 숨을 거두게 됩니다. 한국에 온지 2년만에 그는 한국 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양화진 죤 해론의 묘 옆에 묻혀있습니다.
로제타는 임신말기에 있었기 때문에 어린 아들 셔우드를 데리고 아이를 낳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귀여운 딸 에디스가 태어나게 되었고, 얼마 후 , 윌리암 제임스 홀의 모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제임스 홀의 모습을 닮은 셔우드 홀과 딸 에디스를 본 모든 교우들은 눈물로 그들을 반겼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로제타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 남편 윌리암 제임스 홀이 이루지 못한 조선 사랑을 네가 이루어라"
로제타는 아들과 딸을 데리고 다시 조선으로 오게 됩니다. 조선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랑하는 딸이 또 한국의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그 딸을 남편 묘 옆에 묻으면서 다시 한번 결심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 사랑하는 내 아들 셔우드 홀과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
로제타 선교사는 남편과 딸을 잃었지만 어린 셔우드를 키우면서 조선 사랑을 실천해 나갔습니다. 그는 평양의 홀 기념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여자환자를 위한 광혜여원을 개원하였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병원을 개원하여 맹인소녀들에게 점자를 교육하면서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를 세웠고, 맹인학교를 확충하여 농아교육도 시작하였습니다.
박점동이라는 한국 여인을 유학시켜 한국 최초의 여의사로 만들었으며 지금 서울 동대문 옆 이화여대부속병원 또한 로제타 선교사가 세운 병원입니다. 서울에 경성 여자의학 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그 병원이 지금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이 되었으며 인천의 간호대학과 기독병원이 모두 로제타 선교사가 세운 병원입니다. 43년간의 한국 사역을 통해 하나님은 큰 일을 이루셨습니다. 미국은 그의 사역을 인정하였고 로제타 선교사는 미국이 뽑은 200대 여인의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어 남편과 딸이 묻혀있는 양화진에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아들 셔우드 홀도 부모님의 조선 사랑을 이어갔습니다. 16세 때에는 선교사님들의 연립주택을 지어주면서 아르바이트를 하였고,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내면서 누구보다도 정들었던 박 에스더라는 최초의 한국 여의사가 결핵으로 숨지게 되자 큰 충격을 받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가 된 셔우드 홀은 결혼하여 부인 메리안과 다시 한국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는 한국 최초로 결핵협회를 창설하였고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판매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선 사랑을 이어가던 셔우드 홀에게 어려움이 왔습니다. 일본과 미국의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 정부는 셔우드 홀을 헌병대에 연행하여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시켜 징역 3년과 5000엔의 벌금형을 내립니다. 가재도구와 집을 팔아 끝까지 한국에 남아있기를 원했으나 결국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셔우드 홀 부부는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쫓겨난 후 셔우드 홀 부부는 인도로 건너가 마지막 힘을 다하여 인도선교에 전념하였습니다.
닥토 홀이 은퇴하여 캐나다에서 쉬고 있던 어느날 그는 한국에서 온 편지를 받았습니다. 결핵협회와 아버지가 세운 광성고등학교에서 보내 온 초청장이었습니다. 91세의 나이로 사랑하는 한국 땅을 밟은 셔우드 홀 부부의 감회는 남달랐습니다. 그는 양화진에 묻혀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의 묘를 방문하고 광성고등학교 예배시간에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유언을 남깁니다.
"I'm still love Korea .....
저는 여전히 한국을 사랑합니다. 제가 죽거든 나를 절대로 미국이나 캐나다 땅에 묻지 마시고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사랑하는 이 나라, 또한 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누이동생이 잠들어 있는 한국 땅에 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9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그의 부인과 함께 아버지인 윌리암 제임스 홀 선교사, 어머니 로제타 선교사, 동생 에디스가 묻혀있는 양화진 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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