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내린 비암리 임도에서 바라본 풍경이 아늑하다.
23년 전의 신혼 초행길.
지금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뼈아픈 기억이 있다.
그 어렵다는 '신랑달아매기'를 기지로 살아난 이틑날
고스톱을 치자는 처갓집 식솔들 제안에 흔쾌히 응했는데
가장 순진해 보이는 둘째 처남댁이 중간에 선수 교체로
판에 끼어든 일이 그 발단이었다.
"헛..처남댁도 고스톱을 다 치실 줄 아십니까?"
"호호호...사람 수가 모자란 것 같아 제가 끼었어요"
"그래도 돈을 잃으시면 후회하실 텐데요?"
"어떤 게 맞는 패인지도 모르니까 고모부께서 도와 주세요..호호호"
그 뒤 그 곱상한 처남댁이 고스톱을 치면서
쉬지 않고 속사포처럼 쏟아냈던 수많은 언어들을
지금도 모조리 기억한다..(이거..장한 거여?)
"어머? 고모부 고모부!!!!(꼭 두 번씩 날 부른다)
이거 짝이 맞는 거죠? 그쵸? 어라? 판쓸이네요?"
"고모부 오늘 되게 안 되시네요..또 피박이세요?
전 판엔 광박을 쓰셨잖아요..어떡해요..호호호"
"호호호..저요..생전 처음 돈을 따나 봐요."
난 시작무렵부터 서서히 오르던 혈압이 점점 심각해져서
119를 불러야 할 상황인데도 그 처남댁의 속사포는
인정을 두지 않고 계속되었다.
게다가 장모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힐끗거리며 구경하는
마누라도 신랑이 거금을 잃는데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으흐흑.
"고모부께서 일부러 봐 주셔서 제가 돈을 다 따네요..호호호"
"고모부 고모부!!!(계속 두 번 부른다.)서울로 가지 마세요"
"엉? 왜요?"(<------속사포의 와중에 간신히 끼어든 청죽의 한 마디)
"이대로 며칠만 더 치면 집을 살 것 같아요..호호호"
"아..네..하하..그런데 냉수 좀 없습니까?"
아무튼 장가를 들기 전에 처가가 있는 동네의
땅 기운에 화기가 있어 좀 매울 거라는 경고는 있었다.
험험..아무튼 그 뒤로 화투를 여간해서 치지 않았지만
행여 치더라도 남자들끼리만 쳤다.
(새가슴하구는..)
각설하고,
의정부에 갑장이 셋 있다.
성격이 아주 점잖은 선비같은 갑장 하나와
성격이 아주 화통하고 괄괄한 갑장 하나와
119요원인 갑장 하나, 이렇게 셋이다.
그 중 주로 같이 라이딩하는 동갑내기는
맨 위의 점잖은 사람인데..
아무튼 이 동갑내기께서는
비록 입상은 못해도 전국대회에 곧잘 출전하여
출전 선수 중 그래도 상위에 들곤 하는 바,
대한민국 국민약골에 성골샌님, 88올림픽 공인 새가슴에
초절전울트라관광라이딩컨트리클럽 라이센스 1호 소지자에
가설라무네..
아무튼 골골계에 그 명성이 파다한
이 청죽과는 확연하게 비교가 되고 있었으니
같이 라이딩을 하면서 그의 뒤를 사력을 다해
좇느라 뼛골이 시리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그의 말은 물론 그럴 듯하다.
'청죽님과 저와의 차이라고 해 봐야 고작 5% 남짓도 안 될 거유
그러니 거의 실력이 같다고 봐야죠..흐흐흐"
그의 설렁설렁 라이딩에 나의 전력질주 추격이
어우러진 데 대한 그의 평가가 이러니
정말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 아닌가.
그리고 설사 1%라도 그렇지,
짐을 더 이상 실을 수 없을 정도로 바리바리
실어서 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있는 비루먹은
당나귀의 등에 파리 한 마리가 와서 앉으니
그 당나귀가 꼬꾸라지더란다.
그 파리에 비하면 1%는 소금이 한 섬이다. 쳇.
그러던 어느날 내게도 희망이 보였다.
그가 느닷없이 마나님을 모시고 라이딩에 나온 것이다.
드디어 무식한(원한이 서린 표현이다..)질주자와
나와의 사이에 완충장치가 생긴 건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희희낙낙하여 인사를 건네며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자전거 잘 타시나 보죠?"
"넹..안녕하세요? 호호호..남자들과 타려니 겁나요
여자가 아무리 잘 타야 어디 남자들 발치라도
따라갈 수 있나요? 호호호"
'흐흐..잘됐다. 저 인간이 설마 자기 마누라를
떼 놓고 내빼진 않겠지..크하하하'
이윽고 가평에 있는 수목원 옆으로 난
축령산 임도로 셋이 오르기 시작했는데 내심
'이거 아무래도 여자가 하나 끼어서
속도가 너무 느려져서 재미가 없는 거 아녀?'
하고 사치스러운 상상까지 했던 건 잠시...
놓친 풍선이 저 멀리 허공으로 가물가물 날아가듯
갑장의 꼬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고
의당 내 뒤에 위치해서 따라왔어야 할
그 아녀자는 갑장의 꽁무니에 바짝 붙더니
얼마 후 둘 다 자취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엉엉
'아니? 저 여자가 시방 세상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부창부수를 외치며 저렇게 열심히
낭군님을 쫓는겨?'
속으로 말도 안 되는 어거지 투정을 하며
무르팍이 깨져라 페달링을 하여 정상에 당도하니
이미 두 사람은 너무 오래 쉰 탓인지
땀이 다 식어 보였다. ㅡ,.ㅡ
그러나 이 내 처량한 신세는
목에서 피가 끓는 것처럼 호흡도 가빴고
그 가쁜 와중에 문득 23년 전
신혼 초행길에 겪었던 뼈아픈 기억이 살아나
그 여걸께서 안 보는 사이에
틈틈이 갑장을 무섭게 째려 보았다.
나중에 도로라이딩을 하면서
갑장님의 마나님이 저 앞으로 치고 나갔을 때
갑장의 뒤에 붙어서 넌지시 물었다.
"아니..어떻게 된 거유? "
"뭘요?"
"요즘 멧돼지도 나온다던데 두 내외가
날 떼어 놓고 내빼니 죽는 줄 알았잖우?"
"그러게요..전 제 뒤에 따라붙는 이가
청죽님이신 줄 알고 있었지 뭐유..흐흐"
"시끄럽소!!!! 이실직고 하시옷!!!"
"흐흐..뭘 이실직고 하라고 하십니까?"
"아니 마나님께서 왜 그렇게 잘 타시는 거죠?"
"아..그거요? 잘 타긴요.
사실은 집사람이 처녀 때
육상선수 출신이긴 했지만 그래도 여자잖우?"
갑장이라고 다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아무튼 그렇게 여름의 끝자락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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