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산을 배신했더니 산이 부르는 것 같네요. (한강에서)
직업이 사이클링 선수라면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할 테지만 취미로 자전거를 타면서 때로 지나치게 선수 흉내를 내는 모습을 발견하곤 했는데 다 부질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어 언젠가부터 격렬하게 타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달리고 싶은 본능이 이따금씩 울컷 치솟을 때면 내 힘껏 페달을 밟아보기는 한다.
산뽕을 맞기 전에 주로 중랑천과 한강의 자전거도로를 이용한 라이딩이었지만, 70~100km 정도의 장거리라면 장거리랄 수 있는 거리를 5년 여 정도 거의 매일 달렸다. 그런데 뭐가 그리 급했는지(사실 급한 일이 없었다) 핸들바에 머리를 처박다시피 달리다 보면 라이딩이 마무리될 무렵엔 늘 피로가 몰려오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속도를 늦추었다. 집에 거의 다 와가는 이 지친 짧은 순간에 비로소 풍경을 보곤 했다.
그때 달리며 나는 무엇을 보았던가. 마주 오는 라이더의 앙다문 입, 노면의 패인 지점, 노면에 떨어져 구르는 검정 비닐 조각, 아이가 먹다 버린 요구르트 병, 마라톤 대회를 위해 노면에 새긴 표시들, 견공들이 실례한 오물 덩어리, 재수 좋던 날의 오백 원짜리 동전 한 개, 바람을 이기지 못해 노면쪽으로 누운 갈대나 튜울립 줄기들, 추월하다 힐끗 훔쳐보는 여인네의 엉덩이 등등, 주로 보는 것들이 대부분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눈썰미가 없기로 소문이 자자한 건 아마도 사물을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고 건성건성 보는 천성 탓이리라. 그래서 그런지 달리다 만나는 주변의 풍광이 언뜻 눈에 들어오는 느낌은 받았지만 광각 밖의 모습들을 구체화시키지 못해 기억속에 담기 어려웠었다.
요즘은 산을 잠시 배반하고 도로라이딩에 몰두하고 있다. 십여 년 라이딩 경력의 초기 5년여는 산을 몰랐던 때라서 도로를 달리며 느끼는 재미가 전부였는데 오랜만에 여나므 날 도로를 타다 보니 당시의 뭉클한 감성이나 오롯한 재미들이 어디 숨었다가 하나 둘 튀어나오기라도 하듯 다시금 새록새록 느껴진다.
전보다 확실히 다른 점은 우선 느려졌다는 점이다.
지천명을 넘긴 나이, 풀샥, 뜸했던 잔차질, 아주 조금 사라진 열정 등등, 속도가 느려지게 만든 의심이 드는 요인들이야 많지만 기본적으로 격렬하게 타고 싶은 생각이 별반 들지 않는 지극히 순화(?)된 요즘의 마음가짐이 가장 큰 요소로 작용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나브로 페달을 밟으면서 한눈을 판다. 광각 밖이었던 곳들에 비로소 눈길을 주는 것이다. 보 아래로 떨어진 얕은 수심의 중랑천 물줄기가 자갈들을 피하느라 어수선하게 흐르는 바람에 반대편 아파트와 가로등의 불빛들을 잘게 부수며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쉼터로 만든 공간의 한적한 벤치에 앉은 청춘의 남녀가 조금 전에 살짝 나눈 키스를 아무도 보지 못했을 거라는 확신까지는 들지 않는 듯 내가 어서 지나치기만을 기다리는 듯한 모습으로 멀뚱멀뚱한 표정을 한 채 서로 떨어져 앉아 있는 모습도 보인다. 꽥!!! 소리에 바라보니 백로인지 왜가리인지 부리가 큰 새는 낮에 뭘 했기에 날도 저문 밤에 저렇게 물속을 노려보고 있을까.
점점 아열대 기후를 닮아가서 그런지 6월인 지금 에어컨이 없는 집안의 공기는 열대야처럼 덥고 습하다. 그러나 자전걸 달리며 맞는 밤바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시원하다. 줄어든 속도로 얻은 넓어진 시야가 받아들이는 자연의 풍광은 덤이다.
태양계는 고사하고 은하조차 우주에선 존재감이 미미한 조그만 점에 불과할 텐데 내가 아무리 속도를 내어 몸부림을 친다 한들 높은 산 바위틈에 수천 년 자생하는 이끼들의 움직임보다 나을 게 뭐가 있으랴. 속도를 늦추니 풍경이 보였다. (이거 무르팍에 기름끼 빠지니 방어기제를 작동시킨 거 아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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